Saturday, December 13 (2025)
최근 부쩍 조급함과 조바심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면서 '도대체 유학을 왜 왔을까?' 하는 본질적인 회의감에 스스로를 밀어 넣고 괴롭혔다.
꽤나 번듯한, 멀쩡히 잘 다니던 직장을 제 발로 걷어차고 나왔다.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을 모두 제공하는 넉넉한 곳간의 회사였다. 무슨 메뉴를 골라 취식할까 배부른 고민을 하던 게 불과 올해 봄인데, 이제는 DoorDash와 UberEats를 동시에 켜두고 오늘 자 Deal은 무엇이 있는지 찾는 게 루틴이 되었다. (지출을 줄이기 위해 나름대로 Grocery Run도 자주 해서 해 먹는 편이다.) 매일 끝도 없이 오르는 환율에 의한 압박감은 덤으로 하겠다.
'덤'이라는 표현보다는 그래도 요 며칠 기말고사를 앞두고 공부를 좀 했으니, 15.450 교과에서 다룬 선형 모델로 보다 적절한 비유를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내 부정적인 감정의 수익률(?)을 Re(i,t)라 하자. 그러면 <Re(i,t) = α(i) + β(i,m)*Re + β(i,hml)*HML(t) + β(i,smb)*SMB(t) + ε(i,t)> 와 같이 놓았을 때, 작금의 'USD/KRW' 숫자들이 ε 정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개똥 같은 비유더라도, 나름 강의에서 배운 내용을 응용할 수 있으니 등록금의 극히 일부는 회수한 것이 아닐까? 하고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네며 다음 문단으로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학을 하면서 얻은 것들이 있다면 좀 마음을 편안히 먹고 조급함과 조바심을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한 주간 생각을 좀 다듬어 보았다.
첫째는 역시 사람이다. 사람에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나는 게 내 인생이다. 두 명의 미국인 룸메이트, 같은 프로그램을 하는 동기들, 러닝크루에서 만난 한국인 분들, 한인교회에서 만난 같은 팀 분들.
내 룸메이트 두 녀석은 정말 자랑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각별한 존재들이다. 지난 8월에 한국에 계신 사랑하는 할머니를 잃었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한국에 있는 어머니를 위로하고 슬픔을 나눌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 괴로웠다. 눈이 퉁퉁 부은 채로 화장실에 가다가 룸메이트 매니를 마주쳤다. 매니가 아무 말 없이 나를 꼭 안아주며 위로했다. 밤엔 한숨도 못 자고 해가 중천에 떠서야 방에서 거실로 내려가는데, 계단 곳곳에 초콜릿 봉지가 놓여 있었다. 냉장고에는 내 이름이 적힌 Bun Bo Hue가 포장된 채 들어 있었다. 평소에도 입이 짧은데, 매니가 억지로 먹이지 않았다면 며칠은 굶었을지도 모른다.
이 시기에 밤에는 방에서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울고 있는데, 싱가포르 동기들이 프로즌 요구르트를 먹으러 가자고 나를 끌고 나갔다. 밤 10시에 하버드 근처까지 걸어가서 아이스크림을 각자 한 컵씩 먹고 산책도 하며 서로의 아픈 경험을 나누었다. 뜨거운 여름밤에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이 중 한 명의 친구가 밑 문단에서 언급할 치맹이라는 녀석이다.) 그 밖에도 평소 무뚝뚝하고 매우 진지한 독일인 친구는 기숙사에서 우연히 마주치더니 진지하게 내게 물었다. "Do you want me to hug you?" 평소 성격을 알기에 그 한마디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물론 훌쩍이면서 괜찮다고 하니까 안아주진 않고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 외에도 클라리스라는 프렌치 동기는 밤늦게 내 기숙사로 찾아와 과일과 달달한 간식이 가득 담긴 박스, 그리고 정성스러운 위로의 카드를 전해 주었다. 한국의 가족을 떠나보낸 슬픔을 새로운 가족들로부터 치유받는 놀라운 경험을 하면서, 미국에서 얻은 가장 큰 가치는 결국 사람이라는 생각을 처음 했던 것 같다.
조금 더 가벼운 일상도 공유하고 싶다. 해가 4시 10분에 지는 구린 날씨 속에서 방에 틀어박혀 공부를 하고 있으면, 내게 별 시덥지 않은 릴스 폭탄을 보내놓는 치맹과 써니가 있다. 참 신기한 것이 릴스 폭탄 보내는 것은 만국 공통인가 보다. 그냥 언어만 한국어가 영어로 바뀌었을 뿐이고, 내용은 다 거기서 거기다. (아, 가끔 외국인이 영어로 shibal의 다양한 용례를 설명하는 영상이라든지 그 비슷한 것들을 공유받을 때도 있다. 그러면 나는 그 친구의 출신 국가에 맞춰서 맞춤형 영상을 찾아 보내곤 한다.)
두 녀석 다 같은 프로그램을 하는 내 동기들인데, 치맹과는 같은 기숙사 건물에 살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나이도 98년생으로 나(99년생)와 가장 가까운 또래며, 싱가포르와 대한민국 모두 징병제 국가라서 군대 경험도 있어서 그런지 가장 잘 통하는 고마운 친구다. 써니는 중국인 친구인데 학부 때 스탠드업 코미디를 했을 정도로 대단히 유쾌하고 센스가 있는 친구로, 내가 섬세한 말장난이나 시덥지 않은 농담을 가장 자주 주고받는 친구다. 지난 추수감사절 연휴 때, 원하던 인턴십에 합격했다며 내게 뉴욕 맨해튼에서 스시 오마카세를 대접해 준 근사한 녀석이다. (둘이 함께 일식당에서 비로소 한중일의 화합을 이루었다.) 물론 백 불 넘는 스시를 사준 사실이 제일 고마웠지만, 한 편으로는 조금의 질투나 시기 없이 진심으로 축하해 줄 사람으로 나를 떠올려 준 것도 참 고마웠다. 취업을 위한 석사 과정인 만큼 프로그램 내에서도 경쟁이 꽤나 치열하고, 그만큼 동기들 간에 미묘한 경쟁이나 날 선 질투도 있다. 적어도 우리 프로그램에서 나한테 만큼은 모두가 편히 축하받으러 올 수 있는 그런 넓은 그릇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이 문단을 쓰고 있는 가운데 또 한 미서부 출신의 친구에게 아이메시지가 도착했다. 대화만 보면 거의 요리사들 간의 대화 같다. "I am cooked", "I might be cooked for XX" 뭐 죄다 cooked 뿐이 없다. 미국 와서 "I am cooked"를 정말 상습적으로 쓰게 되는 것 같다. 별로 썩 좋은 표현은 아닌데, 한국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난 조졌어" 뭐 이런 느낌이다. 비단 똑똑하고 잘 나가는 친구들만 찾는 친구가 아니라, 같이 뭔가 헤매는 느낌이 들고 삽질도 좀 하는 것 같을 때 연락하고 싶은 전우애 느껴지는 그런 친구가 되고 싶다. (괜찮아, 나도 지금 일기 같은 거 쓰느라 공부 안 하고 있어.)
여기까지가 그간 만나고 사귄 소중한 글로벌 친구들과의 이야기라면, 한국인답게 한국인 커뮤니티를 통해서도 많은 정서적인 안정을 느끼고 있다. 매주 토요일 아침 9시에 찰스강을 따라 달리는 MIT 한인 러닝크루에 가입하여 지난 6월부터 꾸준히 달리고 있다. 사실 금요일 저녁에 한 잔 한다거나 늦게까지 일하거나 논다거나 하면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달리러 나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훌륭한 석박사 과정 한국인 분들이랑 달리면 남은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을 알차게 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확실히 Self-disciplined인 사람들과 교류하면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게 된다. (개인적으로 사람이 사람한테 '자극'을 받는다는 표현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누가 나한테 "너 덕분에 자극받았어"라고 이야기하면 마치 상대의 강화 재료쯤으로 쓰인 기분이 들어서 사용을 지양하는 편이다. 상대 덕분에 에너지를 얻는다거나 좋은 영향을 받는다거나 우리나라 말 중에 더 아름다운 표현이 많다.)
누군가 내게 종교가 있냐고 물으면 항상 3초 정도 고민하다가 "무교입니다." 하곤 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1년에 한 번 교회에 나갔는데, 주로 엄마의 생신 근방에 못 이기는 척 나갔던 게 다였다. 미국에 와서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지내면서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많이 커졌는데, 엄마가 그리 원하는데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집 근처 한인교회에 나가보기로 결심했다. 전에 뉴욕에 갔을 때 뉴저지 할머니께 "요즘 교회에 가벼운 마음으로 다니고 있어요." 했더니 할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계속 교회에 다니다 보면 목사님 말씀이 은혜로 다가올 것이야."
솔직히 아직 신을 만난 경험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신기한 것은, 늘 마음이 힘든 시기에 교회에 발걸음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2019년 군에 입대했을 당시, 몸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훈련소에서 모든 걸 감시받고 통제받는 환경으로 인해 마음이 무거웠다. 그 당시 첫 주말에 소대장이 우리 분대를 찾아, 선택지는 교회, 성당, 불교가 있으니 종교활동 갈 인원은 셋 중에 하나 골라서 내라고 했다. (교회, 성당, 절이거나 기독교, 천주교, 불교면 모를까 왜 늘 교회, 성당, 불교라고 불렀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절은 절이 아니었을지도.) 훈련소 동기들 사이에서 많은 이야기가 나와 금세 북새통이 되었다. 성당이 맘스터치 햄버거를 준다느니, 불교가 몽쉘 크림카카오랑 탄산음료를 많이 준다느니 다들 각자 들은 이야기를 하기 바빴다. 다들 교회가 제일 간식 풀이 별로라고 했다.
그때 열두 명 중에 딱 둘만 교회를 골랐다. 독실한 교회 오빠 스타일 95년생 형 하나랑 나였다. 사회에서 교회 다녔냐고 형이 묻길래 "우리 엄마가 열심히 다녀." 했다. (그 뒤로 형이 수료할 때까지 쭉 잘 챙겨줬다.) 아무튼 그 당시에 훈련소가 5주였나 그랬는데, 매 주일 만근(저녁 예배와 간증, 세례식 포함)을 하면 '다니엘 용사'가 되고 황금 십자가 배지를 준다고 했었다. 사회의 물건이라고는 올인원 바디워시, 선크림과 위장크림 정도밖에 소지할 수 없었던 훈련병으로서, 그 반짝이는 황금 십자가가 너무 가지고 싶었다. 하나님이 이 의도를 알면 그리 달가워 하시진 않을 것 같은데, 정말 그 황금 십자가에 눈이 멀어 5주를 꼬박 다 교회에 나갔다. (논산에서 부르는 '멈출 수 없네'와 '실로암'은 정말 MAMA 무대도 뺨치는 전설적인 무대였다.) 모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고, 수료식 날 황금 십자가를 군복에 달고 '다니엘 용사'가 되어 엄마와 재회했고, 엄마가 보자마자 많이 울었다.
올해도 생각해 보면 비슷한 동기와 비슷한 취지로 교회에 나갔던 것 같다. 미국에서, 또 MIT라는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잘 적응한 것 같다가도, 이따금씩 찾아오는 조바심, 조급함, 초조함 이런 감정들에 최근에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교회도 더 자주 나가고, 지금 느끼는 고통도 축복이 될 거라는 말씀도 큰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교회에서 팀 모임을 하는데 내가 배정된 팀 분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한 주간 일상과 고민을 듣고, 어쩔 땐 내 속마음과 고민도 나누는 그 시간이 나쁘지 않아서 놀랐다.
예전에는 그렇게 공유하는 시간이 싫어서 교회를 멀리 했었다. 특히 엄마랑 한 번씩 가면 되게 정신적으로 약해 보이는 분들이 엄마를 붙들고 기를 다 빼놓는 것 같아 미웠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내게 예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다 똑같이 나약한 존재라고, 병을 치유하러 가는 병원에 환자가 가장 많듯이 교회에도 죄인이 가장 많은 것이라고 했다. 요즘은 조금씩 엄마의 말이 와닿는다. 꼭 교회와 하나님이 아닐지라도, 우리 인간이 종교를 가지면 가장 좋은 점은 겸손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거대한 움직임이 스피노자가 말한 자연으로 인해 비롯된 것이든 아퀴나스가 말한 신의 행위이든 인간은 정말 한없이 나약한 존재가 맞다. 그래서 더더욱 주위 사람한테 의지하고 사람에 둘러싸여 살게 되는 것 아닐까. 아무튼 이곳에서 또 새로운 사람을 얻었다.
둘째, 운동하는 습관을 길렀다. 올 한 해 스트라바 기록 보니 어느덧 800km를 뛰었다. 올해 가을에 애플워치를 구입하기 전에는 굳이 스트라바를 안 켜고 뛴 적이 더 많아서, 아마 제대로 셈하면 족히 1,000km는 넘게 달렸을 것이다. 무라카미 아저씨도 말했지만 찰스강은 안 달리기가 힘든 환경이다. 인간의 거주 환경에 큰 강이 있다는 것은 정말 축복이다. 그 강을 따라 달릴 수 있다는 것은 더더욱 큰 축복이다. 더군다나, 날이 더우나 날이 추우나 정말 남녀노소LGBTQ+ (내가 방금 만든 단어다) 가릴 것 없이 모든 이가 달리기 때문에 핑계를 대고 싶어도 핑계를 댈 수도 없다. 어제도 달렸고 오늘도 달렸고 내일도 달릴 거다.
그리고 최근에는 근력 운동도 다시 이어가고 있다. 근력 운동을 하는 가장 큰 동력은 두꺼워지는 나의 몸일 텐데, 달리기를 거의 매일 같이 하는 사람으로서 유산소 운동은 그 정 반대의 효과를 가진다. 다소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느낌이 들지만 두툼하고 단단한 몸과 유연하고 탄력 있는 몸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아서 하루 다섯 끼를 챙겨 먹으면서 더 열심히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게 되었냐 하면, 운동하는 습관은 어릴 때(나는 아직 내가 어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학생 신분인 지금 길러 놓지 않으면 평생 어렵겠다는 걸 느꼈다. 1년 반 남짓이지만 직장인의 삶을 경험해 보니, 습관을 갖춘 채로 직장인이 된 게 아니라면 직장인이 되어 운동을 시작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까 하루라도 어리고 학생인 지금 더 열심히 달리고 더 열심히 밀고 당겨야겠다.
셋째,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배웠다. 어제 우연히 룸메이트의 친구가 우리 집에 들러 잠깐 대화를 나누었다. 생물학적 성별이 여성인 친구인데, 자연스럽게 문장을 구사하다가 "with my girlfriend"라는 표현을 사용하더라. 조용히 눈치채고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나도 다음 문장을 이어갔다. 한국에 있을 때는 그냥 매체를 통해서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배웠고, 그냥 받아들이라고만 하니 괜한 거부감이 들거나 뭔가 이상하고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특히 한국의 방식은 뭐랄까, 누군가 나와서 "이것도 복수정답이니까 외워!" 하고 소리치는 느낌이었다.
여기서는 그냥 정답이 없는 설문지의 다양한 답변 내용을 서로 공유하는 느낌이다. 당장 내 친구들 중에도 스스로 정한 성별을 가지고 사는 친구, 본인을 They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친구(문법적으로는 You처럼 사용하면 된다. 나는 다른 것보다도 They is라고 써야 하는지가 제일 궁금했다.) 등 모든 친구들이 다 있어서 그냥 똑같은 사람쯤으로 모든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정말 신기한 게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성별의 상대와 연애를 하는지, 사람이랑 연애를 하는 건 맞는지조차 예측이 안되니까 어느 순간 궁금하지도 않아 졌다.
누군가를 여자로, 남자로 보기에 앞서 그냥 사람으로 한 개인을 바라보게 되니까 아~무것도 내 눈에 이상하지 않다. 웃통을 다 벗고 달리는 남성 러너든, 삭발을 하고 다니는 생물학적 여성이든, 손가락과 발가락에 밝은 색상의 칠을 한 생물학적 남성이든 말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배웠다. 한국에 쭉 있었다면 이번 생을 끝마칠 때까지 절대 이러한 가치를 얻지 못했을 것 같다. 개인을 대할 때 아무런 편견없는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아 물론, 우리 사회에 가져올 수 있는 제도적 혼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생물학적 남성이 여성 올림픽의 금메달을 차지한다거나 하는 것은 음...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숙제다.)
넷째, 완벽주의를 버리게 되었다. 속된 말로 쳐내는 법을 배웠다. 직장을 다니다가 다시 공부를 하려니까 더 그런 것 같다. 완벽할 수도 없고, 더는 완벽하고 싶지도 않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우리 파트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이 "빨리 쳐내"였다. 어차피 아무리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달려도, 계획대로만 흘러가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학점이든 공부든 어느 허들을 넘는 이상 그 극한까지 닿기 위해 스스로를 괴롭히는 게 큰 의미가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충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그 묘한 닿을 수 없는 완벽에 대한 집착을 버리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늘 성실했다. 안달복달하는 유난스러운 성격까지 더해, 학부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며 졸업했다. 대학원 만큼은 점수나 학점 등 정량적인 가치에 더는 의지하지 않고, 조금 더 거시적으로 배움을 바라보게 되었으면 했다. 해외에서 가방끈을 끝까지 늘린 사촌 누나가 지난 여름에 내게 이런 말을 건넸다. "유학 가서는 완벽을 목표로 공부하지 말고, 시작한 걸 끝낸다는 마음으로 해!" 어느 정도 잘 실천하고 있는 듯 하다.
좋은 계기도 있었다. 지난 7월, MIT에서 첫 중간고사 시험을 쳤다. 석사 생활 첫 단추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하필 TA(조교)님이 한국인인데다가 같은 학부 출신 선배님이셔서 좀 부끄럽지 않게 잘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한 주 전부터 학교 도서관에 콕 들어박혀서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 마냥 공부를 꽤나 열심히 했다. 그리고 실제로 시험도 과제와 크게 다르지 않게 나와서 시험도 노력한 만큼 봤다. 그렇게 시험을 시간보다 일찍 마치고 고개를 들었는데, 같이 듣는 학생들 네다섯명이 답을 공유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시험을 마치고 한 30분 정도 꽤 언짢았다. 내 노력이 그들의 부정행위로 물거품 된 기분이 들었다. 시험 중간에 물을 뜨러 가고, 화장실을 들락날락 하고, 심지어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뒤 학생 시험지를 흘기고, 이런 게 제대로 통제되지 않은 시험 환경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공정에 최우선 가치를 부여하던 고등학생 때의 나였다면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정행위를 고발하거나 시험 끝나고 교수님을 찾아갔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날은 그러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상 모든 룰과 제도를 나 하나가 공정하게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그냥 그렇게 양심을 팔 사람은 팔고, 나는 나 자신한테 떳떳하게 내 갈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다시 한 번 다짐했고 그 뒤로 학교 생활 하면서 마음이 참 편해졌다. 성적표에 B 몇 개 찍혀도 괜찮으니까, 남은 석사 생활 동안 자신있게 당당하게 살아가자고. 학점 관리는 학부생 때 할 만큼 했으니, 석사 때는 '내가 배우고 싶은 것', '내가 얻고 싶은 것'에 집중해서 마음껏 이 시기를 즐기고 공부하고 배우자고 말이다. 사실 이 부분은 7월의 일기에서 발췌해 왔는데, 실제로 지난 몇 개월동안 잘 실천한 것 같아 나름 뿌듯하다.
마지막으로, 너그럽고 유해지는 훈련을 하게 되었다. 학부 때 국제 경영론 수업 시간에 '외국비용'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 이 나라 말로는 Cost of Foreigness 라고 해서, 주로 외국 기업들이 현지에 진출할 때 겪는 어려움 혹은 지출하는 바보 비용 등을 묘사하는 단어다. 꼭 기업에만 국한되어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나 개인에게도 지난 반년 넘는 시간동안 자주 발생했다.
보스턴 입국 첫 날부터 많은 외국비용을 냈다. 로건 국제공항의 Pick Up Zone을 찾지 못해 우버 기사님을 15분 21초 기다리게 해서 wait time fee를 지출한다거나, 타겟 침구류 세트에 베개가 하나 들어 있는데 베개 커버를 4개입으로 사는 바람에 베개를 하나 더 사러 매장에 두 번 왕복한다거나, 슈퍼싱글 사이즈 침대에 걸맞는(?) 킹사이즈 이불을 구입한다거나, 4시간 동안 도서관에 앉아 MIT Secure Wi-Fi 연결 고작 하나를 해결한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경험하면서 사람이 오히려 너그럽고 유해지는 것 같다. 별 것 아닌 것 하나만 해도 스스로를 대견해 할 수 있는 그런 자세가 생겼다. 빨래만 옷 줄어들지 않게 잘 끝내도 성취감이 드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가성비가 좋은 인생인가?
타지 생활을 잘 헤쳐나가는 스스로를 위해 직접 만든 단어도 하나 있는데, 바로 '외국수입'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에 사는 사람들이 베푸는 친절과 호의가 있다. 걷는 중에 길에서 재채기를 하니까 맞은 편 걸어오던 일면식도 없고 앞으로도 다시 볼 일 없는 백인 중년 여성이 "Bless you"를 외치고 갔다. 별 일 아니지만 나라는 사람이 이런 일상을 참 크게 받아들이고 이런 사소한 친절과 유쾌한 소통에서 큰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란 걸 미국에서 알게 되었다. 나도 그렇게 유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다.
하버드생 268명의 인생을 72년간 추적 연구한 결과,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일곱 가지 중에 1번이 '고통에 적응하는 성숙한 자세'였다고 한다. 내가 위에서 얻었다고 밝힌 다섯 가지 가치가 앞으로 본인이 이 삶에서 마주할 여러 고통에 잘 대처하고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니, 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잘 쌓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급함을 조금 더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