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붙잡는 듯 놓아버리는 듯, 그 모호함 속에서

해명과 단절

by 가린

“와— 진짜? 너무 잘됐다!!”

자랑할 일이 생겼다.
얼른 오빠에게 전화해야지.


…아, 맞다. 우리 헤어졌지.

9년이라는 시간은 참 길다.
헤어진 지 3개월이 지났는데도
습관처럼 그에게 전화를 걸 뻔했다.


나는 한 사람과 깊게 애착이 생기면
그 사람만으로 충분해지는 타입이었다.

그래서인지

10대 때, 20대 초반에 많던 친구들이
어느 순간 모두 사라져 있었다.


기쁜 일이 생겨도
연락할 사람이 없는 삶.
행복한데, 행복하지 않은 마음.


생각은 ‘내가 왜 그랬을까’에서

또다시 ‘그도 그럴까’로 흘러갔다.

‘혹시 그도 우리의 루틴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그 기대를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찾아왔다.


“은수야, 운동하러 왔다가 잠깐 들렀어.
혹시 수아가 너한테 뭐라 안 해?”

“응? 무슨 말?”

“아냐, 나간다~”


그의 태도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나는 결국 복도까지 따라나가 물었다.

“대체 무슨 얘긴데?”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어제… 수아랑 카페에서 마주쳤는데
내가 여자랑 있었거든.
네가 오해할까 봐…”

그 말을 듣는 순간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올라왔다.

‘우린 헤어졌는데
네가 누구랑 있든 무슨 상관인데.’

그리고,
‘누구지? 벌써? 한 달 만에…?
원래 알던 사람이야? 소개받은 거야?
설마 바람이었어?’


통제되지 않는 상상들이 폭주하듯 쏟아졌다.

잠시 후, 그에게서 긴 카톡이 왔다.

“나 여자 안 만나.
힘든 일 상담해 달라고 해서 본 거야.
밥도 먹자고 했는데 나 그냥 집에 왔어.
오해하지 마, 은수야.”

그는 그 여자와 주고받은

메시지까지 캡처해서 보내줬다.

그걸 보는 순간 또 흔들렸다.


왜 이렇게까지 해명하는 걸까.
아니, 해명해 줘서 고마운 걸까.

감정이 앞선 나는

엉뚱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래. 내가 힘들 때는 도망가더니
다른 사람 일은 잘 도와주네.”


정말 왜 그랬을까.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오빠는 바로 답했다.

“그런 게 아니야. 미안해.
정말 아니야.
우리… 그냥 좋게 마무리하자.”


그때는 몰랐다.
왜 그가 이렇게 과하게 설명하는지,
왜 나를 달래는 듯한 태도를 보였는지.


혹시 아직 마음이 남은 건지,
아니면 정말 정리를 원한 건지
그 중간에서 나는 계속 미끄러졌다.

아무 의미도 없는 말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의 태도에는 아주 단순한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우리가 잠시 헤어졌을 때,
내가 그가 연락하던 여자와 연락한 일이 있었다.
그 기억이 떠올랐던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시 비슷한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그는 조금 더 선명하게

선그음을 하고 싶었을지도.


그게 미안함인지,

9년의 습관인지,

정리하려는 결심인지

지금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그때의 나는

그 모든 것을 사랑의 잔재로 착각했다.


그리고 나도 알았다.

이번엔 예전과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걸.

그래서 답장하지 않았다.

이별 후 무너지는 건
상처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찾아오는

‘늦은 이해’ 때문이었다.


그제야 모든 감정이

조용히, 그리고 차갑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작가의 이전글4. 행복보다 아픔이 오래 남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