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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ee Oct 05. 2019

우리 모두가 광대다.

영화< JOKER >





영화 <조커>를 보았다.


어디까지나 성인에 의한, 성인의, 성인을 위한 디씨 코믹스의 빌런.


역시나 축축하고 심각하리만큼 어둡다.


조커의 탄생비화는

줄곧 불분명한 상태였기 때문에

수많은 추측들이 난무했으나,


이번 영화의 개봉으로

조커의 활동에 상당한 정당성을 부여하게 될 듯하다.


단독으로 내세운 조커 영화는 정의가 없는 불완전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매혹적인 광기를 내뿜으며 불완전함을 상대적으로 보완시킨다.


이 위험한 광기에 사람들은 왜 열광하는가.



첫째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꼬집는다.


- 시대의 배경은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가 상영되는 1936년 즈음으로 보인다.

자본가들의 횡포로 인해 처참한 삶을 살았던 노동자들의 애환이 부유층의 또 다른 소비로 나타나는 시대.

그 시대의 모순이 오늘날의 한국 사회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에 다수가 공감을 나타내는건 아닐까.



둘째로, 복지제도의 부실과 사회 곳곳에 방치되어 있는 소외계층에게 국가는 무정부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은 때론 자신의 위치를 선점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기도 한다.


인간은 그럴싸하게 도덕을 포장함으로써

그것을  통해 보이는 특별함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희생양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

이들은 또 다시 혐오의 대상이 되고, 방치된다.

이들을 위한 제도는 빛 좋은 개살구처럼,

형식적인 틀일 뿐.




셋째로,  불편한 선악의 관념은 상대적이라는 메세지를 단진다.


우리가 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결코 선이 될 수 없고

악을 악이라고 판단할 수 없게 되는 장치들을 무수히 드러냄으로써 선과 악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보여준다.


악에 대한 정당방위라고 생각하기에 너무 과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내가 느낀 감정은 무엇인가?


영화조커는 선과 악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는 인간 아서이자 광대 조커라는 것이다.


시위대속 대중은 조커의 가면을 쓰고 있다.

왜? 그들이 조커가 되기를 자처했다는 것이다.

부유층과 소외층의 갈등은 단순히 자본에 대한 싸움이 이니다. 부유층이 만들어낸 소외층에 대한 혐오에 대한 싸움이다. 소외층을 향한 비웃음과 폭력이 당연하게 만드는 구조에 대한 싸움이다.



배신, 폭력, 우울, 슬픔, 가난, 포기, 절망,

부정적인 환경 속에 노출되어 있지만

성공적인 희망스토리로 스스로를 위안하고

우울함을 숨긴 채 기쁨의 가면을 끼고서 살아가는

시대의 조커들.



이 영화는 단순히 조커라는 인물을 소개하기 위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 속 대중이 광대가면을 쓰고 거리로 나선 것은

순수한 악 그 자체를 옹호하기 위함이 아닌 것이다.


다크나이트의 조커와는 어쩌면 다른 비교 선상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 속에서 풍기는 냄새는 불쾌하기 짝이 없지만 조커의 광기가 지독하리만큼 매력적인 이유는 그를 둘러싼 고담의 도시문제, 아니 어쩌면 우리 사회의 문제가 각성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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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지극히 개인적인) 심심한 결론:


약자를 무시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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