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너무 커질 때
기록은 내게 거의 ‘그 자체’다.
증거라기보다, 보험이라기보다, 기도라기보다… 그냥 기록.
잊고 싶지 않아서. 잊으면 마치 사라지는 것 같아서. 그걸 막기 위한 수단.
여행에서 이 마음은 더 진해진다. 그날의 공기가, 그날의 온도가, 그날의 표정이—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것처럼 느껴지니까. 그래서 나는 적는다. 찍는다. 저장한다. 정리한다. 그리고 가끔은, 그 집착이 터진다.
“아씨 저널(아이폰 일기 앱) 날라갔네 개 빡치게.”
삿포로 첫날부터 그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보다도, 그걸 ‘남길 그릇’이 깨졌다는 사실에 더 화가 났다. 감정이 과했나 싶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해가 된다. 내게 기록은 “나 여기 있었다”의 증명이니까. 내가 이 장면을 살았다는 사실이, 기록이 없으면 갑자기 가벼워지는 것 같아서.
그래서 물건을 산다.
빵, 우유, 과자, 엽서, 버터샌드…
물건을 사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인다. 내가 여기에 다녀왔다는 증거가 생긴 느낌. 손에 쥘 수 있는 형태로 기억을 붙잡아둔 느낌.
근데 이번 여행에서 스스로를 보며 알게 됐다. 나는 물건을 ‘나’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종종 ‘타인’ 때문에 산다. 선물로, 증거로,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이거 사가면 누가 좋아할까” “이거는 ‘왔다’는 티가 나지 않나” 같은 생각이 물건 고르기보다 먼저 튀어나온다.
반면 엄마는 달랐다. 엄마는 가볍다. 증거가 아니라 호기심이다.
“이거 궁금하다.” “이거 먹어보고 싶다.” “이거 갖고 싶다.”
엄마는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움직이고, 나는 종종 타인을 기준으로 움직인다. 엄마는 ‘살고’, 나는 ‘남기려’ 한다. 그 차이가 여행에서 드러난다.
나는 “남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무거워지고, 엄마는 “지금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볍다. 그래서 나는 정리할 게 너무 많아지고, 엄마는 그 자리에서 그냥 즐긴다. 그렇게 나는 여행을 소유하려 하고, 엄마는 여행을 살아낸다.
그럼에도 이상한 건—사진이 없어도 또렷하게 남는 장면들이 있다는 거다.
오타루 숙소에서의 조식. 접시를 몇 번이나 더 가져오면서, “이건 맛있다”가 아니라 “이건 새롭다”가 계속 쌓이던 순간.
노천탕에서 엄마랑 둘이 놀던 때. 눈이 굵어지고, 김이 피어오르고, 엄마가 웃고, 나도 웃고. 그 순간은 사진이 아니라 감각으로 저장돼 있다. 손에 쥔 물건이 아니라, 몸에 남아 있다.
그러고 나서야 내가 가진 강박의 정체가 보였다.
나는 기록을 남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잊을까 봐 무서웠던 거였다. 기록이 없으면 사라질까 봐. 그래서 더 많이 적고, 더 많이 찍고, 더 많이 사고. ‘나는 이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고 나 스스로에게 확인받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기록 없이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기록하려고 애쓰는 순간, 그 장면을 ‘살아내는 감각’이 줄어들기도 한다. 가장 선명하게 남는 건 늘, 내가 화면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그래서 나는 아주 현실적인 규칙을 만들고 싶다. 거창한 해방은 못 하니까.
하루에 하나만 남기기.
물건 하나, 문장 하나, 장면 하나.
물건 하나는 “증거”가 아니라 “내가 진짜 좋아서” 고른 것으로.
문장 하나는 기억을 붙잡으려고 쓰는 게 아니라, 오늘의 나를 알아보려고 쓰는 것으로.
장면 하나는 사진이 아니라 눈으로 저장하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내 강박도 조금은 착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기록이 나를 갉아먹는 방식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아효, 그래도 여행 내내 일기는 다 썼네. 이것도 병인가.
근데… 병이면 또 어때. 나는 원래 잊지 않으려고 애써온 사람이고, 이제는 그 애씀을 조금 덜 불안하게 만들고 싶을 뿐이다. 남기느라 놓치지 않기로. 기록 때문에 현재를 잃지 않기로.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너무 커질 때는, 오히려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된다.
지금 내가 붙잡고 싶은 건 증거인지, 아니면 감각인지.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감각은 생각보다 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