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 속의 기록자
내가 쓴 어떤 사람의 작품
꿈을 장롱 속에 감춰 두었다가
늘그막에 꺼내 보았더니
그 옛날,
내가 쓴 어떤 사람의 작품 속에는
낡은 이야기가 실려 있고
아직도 내 삶의 주인공이 거기에 갇혀 있었다.
내가 모르는 연인과 내일을 꿈꾸며
나를 아는 동지와 오늘을 헤매는 까닭도
어제의 그 애절함에 대하여
먼 훗날,
장롱 속에 갇히게 된 사연과
우리들만의 이야기를 그나마 털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다시는 싣지 않았던 옛이야기를 듣는 대신
나와 내 꿈은 낡아져서
내가 쓴,
장롱 속에 갇힌 주인공은
어떤 사람의 작품 속에서도 꺼낼 수 없게 되었다.
[장롱 속의 기록자]
먼지 쌓인 장롱 깊숙한 곳, 빛바랜 오동나무 서랍을 열자 눅눅한 종이 냄새가 확 끼쳐 왔다. 수십 년간 한 번도 들춰보지 않았던 원고 뭉치였다. 손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은 거칠고 푸석했다. 마치 내 젊음의 허물처럼.
원고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그 옛날, 내가 써 내려갔던 '어떤 사람'의 일생이 활자 위로 살아났다. 그 속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뜨거웠고, 무모했다. 하지만 이제 와 다시 펼쳐본 그 작품 속엔 낡고 먼지 낀 이야기들만 가득했다. 그리고 그 시절, 내가 그토록 동경하며 그려냈던 주인공은 여전히 그 낡은 문장들 사이에 갇혀, 세월의 흐름도 모른 채 멈춰 있었다.
"자네, 아직도 거기 있었나."
나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소설 속 주인공은 내가 알지 못하는 연인과 찬란한 내일을 약속하고 있었고, 내가 잘 아는 동지들과 함께 불확실한 오늘을 치열하게 헤매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한때 가졌으나 지금은 잃어버린 풍경이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장롱 속에 가두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언젠가 찾아올 '먼 훗날'의 나에게, 그때의 애절함과 우리들만의 은밀한 사연을 털어놓을 창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삶이 버거워질 때마다 나는 이 장롱 속에 나의 일부를 저금하듯 숨겨두었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묵혀두었던 탓일까. 원고를 읽어 내려가는 나의 눈동자는 이제 희뿌옇고, 행간을 짚는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툭 불거져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아니, 쓰지 못했다. 세상에 순응하며 사는 동안 나의 꿈은 낡아졌고, 문장은 무뎌졌다. 장롱 속에 갇혀 있던 주인공을 세상 밖으로 꺼내어 마침표를 찍어주려 했지만, 나는 이내 깨닫고 말았다.
그 찬란했던 주인공은 오직 이 낡은 원고 속에서만 숨 쉴 수 있다는 것을. 이미 퇴색해버린 나의 감각으로는, 그 어떤 새로운 작품을 써내더라도 그 시절의 그를 온전히 꺼낼 방법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조용히 원고를 덮고 다시 서랍을 닫았다. 주인공은 다시 어둠 속에 갇혔지만, 그의 슬픔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낡아버린 것은 그가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지금의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