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는 순간, 세계는 바뀐다
우리는 세상이 이미 완성되어 있고,
나는 그 위를 살아가며 바라본다고 믿어왔다.
현실은 언제나 거기 있었고,
나는 그저 늦게 도착한 관찰자라고.
하지만 이 믿음은
양자역학 앞에서 처음으로 흔들린다.
현실은 정말 나와 무관하게 이미 존재했을까.
존재에 대해 오래 고민해 온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를 ‘이미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사건’으로 이해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존재는 대상이 아니라, 드러남이다.”
이 말은
빛의 존재 방식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빛은 관측되기 전까지
하나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관계가 형성되는 순간,
그제야 하나의 현실로 드러난다.
빛을 떠올려 보자.
빛은 관측되기 전까지 하나의 모습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그 둘 중 어느 하나로 결정되지 않은 채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가 보려는 순간,
더 정확히는 보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순간,
빛은 비로소 하나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 사실은 종종 오해를 낳는다.
“그럼 의식이 현실을 마음대로 만들어낸다는 말인가?”
하지만 양자역학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현실이 상상이나 믿음의 산물이라는 주장도 아니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현실은 언제나 이미 거기 있는 배경이 아니라,
관계가 형성되는 순간 성립하는 상태라고.
그래서 현실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측정될 때’,
다시 말해 관계가 맺어질 때 존재하게 된다.
이 관점은 우리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여겨왔던 사고방식을 근본부터 흔든다.
“세상은 이미 있고, 우리는 그걸 나중에 본다”는
생각은 더 이상 자명하지 않다.
대신 이런 문장이 자리를 차지한다.
홀로 있을 때는 가능성이고, 만났을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이 문장은 빛에 대한 설명이지만,
이상하리만큼 인간에게도 잘 들어맞는다.
우리는 과연 혼자 있을 때 완성된 존재일까?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어떤 관계도 맺지 않을 때,
그때의 나는 이미 하나의 고정된 ‘나’일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언제나 관계 속에서 달라진다.
누구와 함께 있는지에 따라 말투가 달라지고,
어떤 역할에 놓이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어떤 순간에는 단호해지고,
어떤 순간에는 한없이 흔들린다.
그렇다면 인간 역시 빛처럼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빛의 존재를 이해하려다 보면
과학적 개념만으로는 설명이 닿지 않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그 지점에서 사고는 자연스럽게 철학으로 이어진다.
‘존재란 무엇인가’, ‘현실이란 무엇인가’,
‘나는 언제 나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들로.
이 질문들은 결코 추상적인 사유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현실적인 감정,
특히 우리가 자주 느끼는 불안과 맞닿아 있다.
이미 정해진 세상 속에서
이미 규정된 나로 살아가야 한다는 믿음은
삶을 끊임없이 조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현실이 고정된 무대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계속 형성되는 과정이라면,
삶은 조금 덜 단단해도 괜찮아진다.
완벽히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불안의 이유가 아니라
여지와 숨 쉴 공간이 된다.
이 연재는 양자역학을 통해
사람과 존재의 문제를 다시 바라보려는 시도다.
어렵고 낯선 과학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오래 당연하게 여겨온 전제들을
조금만 옆으로 비켜 세워보려는 시도다.
빛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존재는 홀로 완성되지 않는다고.
관계 속에서 비로소 모습을 얻는다고.
이제, 그 이야기를
한 걸음씩 천천히 시작해보려 한다.
머무는 생각 -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는 이미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사건이다.”
머무는 시 -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