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기 전까지 가능성으로 머무는 빛의 낯선 존재 방식.
1화, 빛은 왜 하나의 모습으로 정해지지 않는가
- 보기 전까지 가능성으로 머무는 빛의 낯선 존재 방식.
빛은 보기 전까지
하나의 상태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 말은 빛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하나로 확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상태를 설명하는 데
뜻밖에도 고대 철학의 언어가 도움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두 층위로 나누었다.
가능태(dynamis)와 현실태(energeia).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능태는 현실태를 향해 열려 있다.”
빛은 관측되기 전,
가능태의 상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관측이라는 조건이 주어질 때,
그 가능성 중 하나가 현실태로 드러난다.
빛은 처음부터 부족했던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열려 있었을 뿐이다.
빛은 이상하다.
우리가 보지 않을 때, 빛은 하나의 모습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어디에 있는지, 어떤 형태인지, 무엇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보려는 순간, 정확히는 측정하려는 순간, 빛은 갑자기 하나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 말은 직관에 잘 맞지 않는다.
우리는 사물이란 원래부터 거기 있고,
다만 우리가 보느냐 보지 않느냐의 문제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불을 끄면 방 안의 가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가 흐릿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빛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빛은 관측되기 전까지
‘이 상태다’라고 말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신 여러 가능성이 겹쳐진 상태로 존재한다.
이를 흔히 중첩이라고 부른다.
어렵게 들리지만, 핵심은 단순하다.
빛은 보기 전까지
“이거다”라고 확정되지 않은 채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이 말은 빛이 흐릿하거나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아직 덜 만들어졌다는 의미도 아니다.
오히려 완전히 열려 있는 상태라고 말하는 편이 가깝다.
그리고 우리가 측정을 하면,
그 가능성들 중 하나가 선택된다.
그 순간 빛은 파동이 되거나, 입자가 된다.
마치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 질문에 맞는 대답이 하나로 정리되는 것처럼.
그래서 “본다”는 행위는
단순히 이미 있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빛에게는,
보여 달라는 요구 자체가 하나의 조건이 된다.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묻는다.
“그럼 우리가 보면 현실이 바뀐다는 말인가?”
“의식이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뜻인가?”
하지만 양자역학은
그런 과감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
빛이 인간의 마음대로 변한다는 말도 아니고,
현실이 상상에 따라 만들어진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한다.
빛의 상태는 관측과 무관하게 이미 확정되어 있지 않다고.
관측은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어떤 방식으로 드러날지를 결정하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은 사소해 보이지만,
우리의 사고방식에는 큰 균열을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현실은 관측과 상관없이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빛은 그 믿음에 조용히 반기를 든다.
존재란 반드시 고정된 형태를 가져야 하는가.
존재는 항상 하나의 모습이어야 하는가.
빛은 말없이 보여준다.
존재는 때로
확정된 실체가 아니라
가능성의 묶음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질문은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이어진다.
빛이 그렇다면,
우리가 ‘본다’고 부르는 그 행위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그 질문을,
다음 이야기에서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려 한다.
빛은 왜 하나의 모습으로 정해지지 않는가
빛이 하나로 정해지는 그 순간,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머무는 생각 - 아리스토텔레스
가능성은 결핍이 아니라, 현실을 향해 열려 있는 상태다.
머무는 시 - 고은
아직 오지 않은 말들이 / 나를 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