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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Jun 27. 2023

믿어주는 부모, 믿을만한 부모

아이를 믿어준다는 것은 뭘까

새 학기를 다짐하는 아이의 이야기를 학부모님께 전했을 때 들은 말.


"지 방 꼬락서니를 보면 다 알죠.

평소에 하는 걸 아는데 믿을 수가 있나요."



▪ 누구나 더 나아지고 싶어 한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만드는 말썽은 다종다양하다. 사소한 말다툼부터 ‘사건’이라 부를만한 일까지 스펙트럼도 넓다. 격한 사건의 중심에 있던 아이들은 한껏 격앙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의외로 차분하게 대화할 수 있다.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잠시 기다리는 것, 아무런 편견 없이 보는 것, 두 가지만 있으면 된다. 드세게 행동하던 아이도 반성과 후회를 눈물과 함께 줄줄 흘린다. 사실은 자신이 원하지 않은 결과이고, 자기 잘못을 안다는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애써 아닌 척하고 싶어도 결국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는 눈물 콧물을 쏟는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나면 많은 생각이 든다. 거친 말과 행동 안에 숨어있던 ‘인간성’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누구나 ‘더 나아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아이들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뭘 하든 상관없이 그저 받아준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믿는다는 건 그 안에 숨어있는 삶에 대한 의지와 성장 욕구를 보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겉으로 보이는 것은 미숙함과 불안한 행동이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믿음이라는 말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믿음을 가진 어른은 조급하게 막아서거나 나서지 않을 것이다. 잠시 기다리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믿음에도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꽤 많은 것들을 돌아보고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을 아이들에게 전달하고 가르치려고 조급해하는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때로는 아이들의 작은 실수나 실패, 혹은 잘못된 일이 큰 재앙을 불러일으킬 것처럼 걱정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을 자리에 앉혀놓고 하나하나 고쳐야 하는 존재로 보게 된다.


학습이며 생활 습관, 교우관계 등등 어른이 생각하는 상에 맞춰 변화시키기 위해 애쓰는데, 그게 잘 될 리가 없다. 그러다 보면 서로에게 실망하게 된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미덥지 않아 하고 불안해하면 아이들도 어른을 믿기 어렵다. 심지어 아이들 스스로도 자신을 신뢰하기 어렵다. 자신이 가진 힘과 가능성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가 스스로 판단하고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은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 필수다.  


일상의 작고 소소한 결정들이 모여 태도와 인성을 만든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신뢰도 그렇게 만들어진다. 아이들을 믿고 존중하는 부모의 모습이 아이들의 마음을 건강하게 만든다. 믿음을 얻은 아이들은 스스로 자기 삶의 동력을 쓰며 나아갈 수 있다. 자기 결정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중요하고, 어른들이 이를 믿음의 눈으로 봐줄 때 아이들은 성장한다. ‘너의 판단과 행동이 너를 더 나아지게 할 것을 알고 있다. 네 삶을 응원한다.’ 그런 메시지가 서로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 잘 포장되어 거래되는 사랑

스웨덴 가정의 아이들은 토요일에만 사탕을 먹을 수 있다. 평일에는 단 음식을 자제하도록 하고 ‘사탕 먹는 날’을 정해서 그날만 먹도록 하는 것이다. 단 음식을 일절 금지시키거나, 반대로 제한 없이 퍼주는 것이 아니다. 평일에는 아이가 떼를 쓰거나 울며 매달려도 어쩔 수 없이 주거나 하지 않는다. 기분 좋다고 선심 쓰듯이 사탕을 내어주는 일도 없다. 약속을 정하고 그 규칙에 따라서 일관되게 행동한다. 부모가 규칙을 지키므로 아이들은 토요일에만 사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1)  


울고 떼쓰는 아이에게 사탕을 내주지 않는 것은 아이들을 믿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라 해도 규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능을 주체 못 하는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부모가 먼저 규칙을 어기고 내준다는 것은, 부모 스스로 자녀를 사탕 한 알을 참지 못하는 미숙한 존재라 인정하는 것과 같다.


아이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무언가를 제시할 때 굳이 포장할 필요도 없다. 채소를 잘게 썰어 튀김옷을 둘러주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맛을 들이게 한다. 차차 적응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어려워하는 일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천천히 시간을 들여 연습시킨다. 결국엔 잘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거기에 설탕 가루 같은 보상으로 덧씌우지 않는다.


우리 일상에는 이런 교묘한 포장이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드러나곤 한다. ‘~하면 ~해줄게’ 식의 거래도 같은 종류다. 성적을 올려야 한다든가, 책을 읽어야 한다든가, 부모가 기대하는 것을 해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해 준다는 식이다. 쓴 알약을 사탕으로 꾀듯 거래를 제안하는 말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조건을 달고 거래해야 한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기회는 사라진다. 서로의 욕구를 교환하는 시장이 열릴 뿐이다.


때로는 이런 방식으로 사랑을 거래하는 경우도 많다. 점수가 올라야,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해야 사랑을 주는 방식이다. 너 하는 거 봐서 믿어주겠다는 메시지가 전달된다. 이런 조건부 믿음에 아이들은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까. 당연히 불안과 불신이다. 부모에게서 믿음과 인정을 얻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피곤하게 지내게 된다. 정말 많은 아이들이 다른 사람도 아닌 부모에게서 신뢰를 얻으려고 애쓰느라 마음에 병이 난다.   


믿음이란 이런 조건을 붙이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해낼 수 있으며 기꺼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믿는 것이다. 눈에 띄는 결과만 보지 말고 아이들이 노력하는 과정을 보는 것, 그리고 더 나아지고자 하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의도적으로 움직이게 하거나, 거래를 통해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시키거나, 벌을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아서 눈치껏 행동하게 하는 것 모두 진정한 신뢰관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친절한 말투와 미소 짓는 얼굴로 한다고 해서 다른 것이 아니다.



▪ 믿을만한 사랑을 주는 사람들인가

이희영의 소설 『페인트』2)는 부모 면접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우리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아이들이 면접을 통해 부모를 선택하는 상상의 세계가 소설의 배경이다. 국가 아동센터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신을 입양하기 위해 방문하는 예비 부모를 면접하고 선택할 수 있다. 각양각색의 부모가 등장하는데 개중에는 정부에서 입양 부부에게 주는 혜택을 받으려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소년은 여러 번의 면접을 거치며 예비 부모들에게 실망한다. 주인공 소년은 어떤 부모를 만나게 될까.


이 소설은 청소년 문학상을 받았다. 청소년이 부모를 직접 선택한다는 설정부터 이미 흥미진진하다. 심사에는 청소년 심사위원들도 참여했는데 134명의 청소년이 ‘통쾌하다’, ‘내 이야기 같다’며 열렬한 찬사를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가족한테서 가장 크게 상처를 받잖아”와 같은 대사들이 청소년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이 소설은 ‘어떤 부모가 좋은 부모인가’라는 질문을 뒤집어서 ‘아이가 원하는 부모는 어떤 부모인가’를 묻고 있다. 아이들에게 믿음을 주는 것 이전에 아이들은 어떤 부모를 믿을만하다고 여길까.


우리는 태어날 때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아이들이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부모를 선택할까. 해달라는 것을 다 해주는 부모를 원할까. 돈이 많고 유명한 부모를 원할까. 자녀를 성공의 길로 이끈다며 당사자보다 더 애쓰는 부모를 아이들은 과연 원할까. 정답은 없겠지만, 그간 만나온 아이들과의 대화를 돌이켜보면 공통적인 답이 있다.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사랑해 주는 부모를 원한다. 어떻게 살든 자신의 삶을 응원해 주고 믿어주는 사람을 원한다.


장점이나 매력이 있어서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니다. 단점도 있고 부족하지만, 그저 사랑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잘 해내고 성공했다고 해서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니다. 실수나 실패에 주변 사람들이 다 떠나가도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부모여야 한다. 조건이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부모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도 아니고 부모 인생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만족시키기 위해 태어난 존재도 아니다. 부모가 바라는 대로 아이를 만드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되기도 어렵다.


평소 하는 것을 보면 맘에 들지 않는 모습이 많겠지만 그걸 바꾸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저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절대적인 믿음과 사랑은 아이들이 스스로 잘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간다. 태어나면서부터 설정된 부모와의 관계가 특별한 가치를 갖는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믿을 만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믿음’을 말하며 이런저런 ‘조건’을 붙일 때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부모로서 주는 믿음이 정말 믿을만한지 말이다.  




※ 참고문헌

1)『스칸디 부모는 자녀에게 시간을 선물한다』. 황레나, 황선준. 위즈덤하우스. 2020. p.114

2)『페인트』. 이희영. 창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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