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편]"부장님, 그 보고서 AI한테 시키면 안돼요?"

20년 차 디지털금융 전략가가 마주한 ‘존재의 위기’

by 박주원 박사
"박 부장님, 이번 주 금요일까지 24년도 디지털 마케팅 중장기 전략안 좀 잡아주세요. 경쟁사 분석이랑 최신 트렌드 다 녹여서요."


2023년 10월의 어느 날, OO은행 디지털전략부에서 받은 임원의 지시였습니다. 금융권 전략기획실과 IT 컨설팅 펌에서 20년을 버텨온 저에게, 이런 류의 보고서는 소위 '주특기'에 가까웠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목차가 그려졌고, 어떤 데이터를 어디서 긁어와야 할지 시뮬레이션이 끝난 상태였죠.


"네, 알겠습니다. 초안 잡아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익숙하게 대답하고 자리로 돌아와 부서원들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입사 2년 차 막내 사원의 한마디가 제 견고했던 세계에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부장님, 그거 그냥 챗GPT한테 시켜보면 안 될까요?"


순간 회의실 공기가 멈칫했습니다. 저는 웃어넘기려 했습니다. "에이, 야. 챗GPT가 뭘 안다고 은행의 마케팅 전략을 짜냐? 우리가 디테일하게 잡아야지."


하지만 막내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진심 어린 눈으로 저를 설득하더군요. "아니에요, 부장님. 요즘 다들 그렇게 해요. 프롬프트만 잘 넣으면 초안 잡는 데 10분도 안 걸려요. 야근 안 하고 좋잖아요."


그 순진무구한 제안 앞에서, 저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그것은 '건방지다'는 분노도, '신기하다'는 호기심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묘한 '무력감(Helplessness)' 같은 것이었습니다.


속도가 아니라, '가치의 붕괴'였다

그날 밤, 저는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 혼자 남아 챗GPT 프롬프트를 입력했습니다.


"국내 시중은행의 20~30대 고객 유입을 위한 디지털 마케팅 전략을 조사해서 마케팅 보고서를 작성해 줘. 경쟁사(토스, 카카오뱅크) 대비 차별화 포인트 3가지를 포함해서."


엔터키를 누르자마자, 화면 위로 검은 커서가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통상 사흘 밤낮을 꼬박 매달려야 했던 자료 조사, 경쟁사 비교, SWOT 분석, 그리고 실행 로드맵까지. 이 녀석은 제가 화장실을 다녀오기도 전인 단 40초 만에 A4 용지 5장 분량의 보고서를 뱉어냈습니다.


내용이 엉망이었냐고요? 아니요. 소름 끼치게 논리적이었습니다. 물론 현업만 아는 '한 끗 차이'와 같은 디테일은 부족했지만, 이 정도 초안이라면 제가 주니어 시절 일주일 내내 깨지며 배웠던 수준 이상이었습니다.


모니터의 푸르스름한 빛을 받으며 멍하니 앉아있는데, 지난 2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는 소위 말하는 '문과 출신 금융맨'이었습니다. 코딩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엔지니어처럼 시스템을 만질 줄 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의 밥벌이 수단은 명확했습니다. 남들보다 빠르게 자료를 찾고(Search), 엑셀 피벗 테이블을 돌리고(Analyze), 그럴듯한 문장으로 포장하는(Writing) 능력. 즉, '정보를 가공하는 성실한 손'과 '논리적인 구조의 보고서'가 저의 유일한 무기였습니다.


그런데 눈앞의 AI는 그 모든 것을 비웃듯 해치웠습니다. 군말도 없고, 실수도 없고, 야근 수당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AI의 공포를 이야기할 때 '속도'를 말합니다. "와, 진짜 빠르네. 편하다." 하지만 전략가인 제 눈에 보인 진짜 공포는 속도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진입장벽의 붕괴'였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 직장인들이 '전문성'이라고 믿어왔던 것들—보고서 작성, 데이터 분석, 외국어 번역—이 이제는 누구나, 아무나 할 수 있는 '공공재(Public Goods)'나 '공짜재(Free Goods)'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내가 10년을 바쳐 얻은 스킬이, 갓 입사한 신입 사원도 클릭 한 번으로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이 되었다면, 나의 연봉과 직급은 도대체 무엇으로 증명해야 합니까?


맥킨지가 예고한 '중간 관리자의 종말'

불안감은 저만의 망상이 아니었습니다. 글로벌 컨설팅 펌 맥킨지(McKinsey & Company)가 발표한 보고서 <생성형 AI의 경제적 잠재력>에 따르면, 현재 지식 노동자가 수행하는 업무의 약 60~70%가 자동화된다고 합니다.

더 잔인한 통계는 그 자동화의 타깃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단순 노무직이 아닙니다. 고임금을 받는 '중간 관리자'와 '전문직'입니다. 자료를 취합하고, 요약하고, 1차적인 판단을 내리는 역할. 바로 저 같은 '부장', '팀장', '과장'들의 업무가 AI의 사정권 정중앙에 놓여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경영진의 시선은 이미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박 부장, 인력이 부족하면 충원해"라고 했을 임원들이, 이제는 이렇게 묻습니다. "박 부장, 그거 AI 툴 쓰면 되잖아? 왜 굳이 사람이 더 필요해?"


이 질문의 진짜 의미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비용을 아끼자"는 말이 아닙니다. "당신의 업무 중 70%는 기계가 대체 가능한, 부가가치가 낮은 일이었다"는 냉혹한 선고와 같은 말입니다.

25년을 넘기고, 26년을 맞이하는 우리는 지금 '해고'를 걱정할 때가 아닙니다. 아니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26년에는 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무서운 건 사무실 책상에 앉아는 있지만, 조직 내에서 서서히 '투명 인간'이 되어가고 있음을 걱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도망쳤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그날 밤 챗GPT가 써낸 보고서를 보며 압도적인 패배감을 맛봤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나는 우아하게 늙어가는 뒷방 늙은이가 되겠구나. 먹고살기 힘들겠구나'


그래서 저는 도망쳤습니다. 안정된 은행 부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클라우드 기업(메가존)과 블록체인 기업(블록오디세이)의 임원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동안 갑의 입장에서 검토했던 진짜 기술(클라우드, 블록체인, Gen AI 등)들을 정확히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는 "미쳤다"라고 했습니다. "박 부장, 지금 나가면 찬바람 불어. 은행만 한 곳이 어디 있다고 그래?"


하지만 저는 알았습니다. 따뜻한 방 안에 앉아서 AI에게 서서히 잠식당하느니, 차라리 찬바람이 불더라도 AI를 파는 쪽으로, 기술의 최전선으로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적지 않은 47세의 나이에 다시 대학원에 들어가 생성형 AI 박사 논문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야생의 현장에서, 저는 은행 안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세 가지 잔인한 진실'을 목격했습니다.


사람들은 "AI는 거짓말(Hallucination)을 하니까 결국 사람이 필요해"라고 위안을 삼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기업의 계산기는 생각보다 훨씬 냉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제가 IT 컨설팅 현장과 AI 스타트업 임원으로 일하며 목격한, '할루시네이션마저 비용으로 관리해 버리는' 기업들의 섬뜩한 생존 방정식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2편에서 계속)


[中편 미리보기]

진실 1: "AI가 실수를 한다고요? 인간은 더 많이 합니다." (통계로 본 오답률의 진실)

진실 2: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그것도 결국 AI가 우리를 가르치게 됩니다.

진실 3: 기업은 '완벽한 직원'을 원하지 않습니다. '가성비 좋은 직원'을 원할 뿐입니다.


▷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혹시 챗GPT나 제미나이 때문에 위협을 느끼신 적이 있나요? 댓글로 솔직한 고민을 나눠주세요.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현실적인 답을 드리겠습니다.


※ 박주원입니다. 법학 전공, 금융MBA, 금융권/IT컨설팅 20년, 그리고 50세에 AI 공학박사. 도망치고, 부딪치고, 다시 도망치며 살아남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 [출간 예정] 『생성형 AI 시대, 기업이 살아남는 법』 (2026년 1월) 이론서가 아닙니다. 현장에서 검증한 처절한 생존 매뉴얼입니다.

협업/강연 문의: fintech119@gmail.com

링크드인: www.linkedin.com/in/joowon-park-ph-d-849b23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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