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축복
착한 딸은 동생이 태어난 세 살 때부터
더 이상 애기가 아니었다.
동생에게 모든 걸 양보해야 했고
엄마 품에 안길 기회조차 많지 않았다.
혼자 책임져야 하는 육아와 살림에
체력이 바닥난 나는 아직 애기인 3살짜리 딸에게
사랑을 많이 주지 못했다.
남편이 일을 마치고 일찍 들어온 어느 날
애 둘을 남편에게 맡기고 집 근처
골목에 있는 구멍가게에 가게 되었다.
처음으로 혼자가 된 나는 갑자기 찾아온
오랜만의 자유가 아까워서 석양 노을을 바라보며
동네를 두 바퀴쯤 돌았다.
발목을 잡혀 날지 못했던 새처럼
가벼운 발걸음이 아무 볼 것도 없는 골목길을
두 바퀴나 돌게 만들었다.
집에 돌아오니 10분도 안된 것 같은데
아이들은 눈물로 얼룩지고 남편은 화가 나 있었다.
아이들이 엄마만 찾았다고 했다.
지금도 아이들은 나와 소통을 더 잘한다.
여늬집처럼 아빠에게 전화할 때는
“엄마는?”
나와 연락이 안 될 때만 아빠에게 전화를 한다.
딸은 겁이 많고 조심성이 많은 아이였다.
밤마다 무섭다고 나의 품에서 잠들고 싶어 했다.
두 아이 틈에 누워서 애들을 재우고도
남은 할 일이 많았다.
종종 애들이 잠들기를 기다리다 지쳐서
내가 먼저 잠들기도 했다.
딸이 크고 나서는 한국말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니까 자연스럽게 우리의 일들을 도와주게 되었다.
처음엔 상대 쪽과 대화를 하고 나서 그들이 아닌 우리를 설득하려고 했다.
상대 쪽이 옳은 경우도 있겠지만
어린 딸에겐 상대방을 설득하기보다
우리를 설득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딸이 40이 되어 가는 지금도 세 살 때 음식을 오물오물 먹던 얼굴이 보인다.
그래서 부모에게 자식은 영원한 어린아이 인가보다.
몇 해전 딸 집에 갔다가 집에 가려고 나왔는데
손주들이 더 있다가 저녁을 먹고 가라고 우릴 잡았다.
언제나 벌어지는 일이었다.
딸이 아이들과 함께 우리를 배웅하러 나왔다가
집 앞 공원에 애들을 놀게 하고
그늘아래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혼자 앉아있는
딸의 모습을 보고 갑자기 선글라스 아래로
눈물이 쏟아졌다.
더 같이 있자고 붙잡는데
같이 있어주지 못하고
갈길이 바빠 떠나는 나의 모습이
언젠가 다가올 미래의 모습처럼 보였다.
내가 없으면 딸이 의지할 데가 없어서 어떻게 살아갈까?
딸은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언제나 나에게 제일 먼저 알려주었다.
집으로 가는 길 차 안에서 선글라스 아래로
빗물처럼 눈물이 흘렀다.
나에겐 강한척하여 가끔 오해도 하지만
나에겐 제일 편한 절친이고 때로는 상담자이자
내가 가끔 대들기도 하는 만만한 스승이다.
그러나 딸은 가끔 치명적인 허점을 보여
딸에 대한 나의 단단한 믿음을 일시에 무너뜨린다.
예를 들면 돈을 말할 때 0 하나를 더하거나 빼서
말하는 바람에 웃음을 자아낸다.
캐나다 돈을 한국돈으로 말할 때 더 오차가 심하다.
그래서 그 애가 말하는 돈은 잘 듣고 판단해야 한다.
내일쯤은 그게 아니었다고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액이 올라가면 갈수록 0 하나가 어마무시 해져서 감당을 못한다.
십만 불인 지 백만 불인 지….
딸의 말이 신용이 떨어지는 소리가
웃음과 함께 들린다.
나와 상관없는 돈의 단위가
동그라미가 하나 더 붙이던 빠지던
그리 중요한 게 아니긴 하다.
다행히 지금은 많이 나아지는 중이다.
먼저 살던 집에 전주인이 심어놓은 한국의
앵두나무 비슷한 게 있었다.
딸이 고등학교 다닐 때였는데
정원의 앵두가 맛있게 익었던 어느 날
대여섯 명의 외국인 친구들이 집으로 놀러 왔다.
집안에서 간식도 먹고 게임도 하고 놀다가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 딸이 앵두를 먹자고 해서 모두 뒷마당으로 나왔다.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한 정원 저쪽에서 딸만 혼자 열심히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친구들이
“야 거기서 뭐 해?”
하고 불렀다.
“앵두나무가 여기쯤 있었는데?”
“뭐라고?”
친구들은 벌써 앵두나무를 발견하고
그 나무 아래서 앵두를 따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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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밴쿠버 필름스쿨에서 같이 공부하는
미국에서 유학을 온 남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너무 잘생겨서 깜짝 놀랐다.
사위는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에다가
재능도 뛰어나고 무엇보다도 똑똑했다.
결혼하고 몇 년 후 딸이 아기를 출산하던 날
나는 사위와 함께 분만실에 있었다.
사위는 딸의 손을 꼭 잡아 주었고 딸은 조산사의 신호에 맞춰 힘을 주었다.
커튼 사이로 부드러운 햇살이 병실 안으로 스며들며 신비스러운 선을 그렸다.
그 순간 세상이 긴장 속에 고요하게 멈춘 듯했다.
딸은 힘들어 보였지만 무통주사를 맞아서인지 침착했다.
예전의 나처럼 아파하지 않았다.
좋은 세상으로 변했구나.
감각이 없는 딸에게 조산사가 힘을 주라는
지시를 할 때마다 우리도 함께 응원을 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아기가 세상밖으로 나왔다.
생명의 신비를 처음으로 보게 된
경건한 순간이었다.
신성한 존재가 태어나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감격하여 흐느꼈다.
딸도 울고 사위도 울고 간호사들까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순간 내 안에서 세 개의 시간이 겹쳐졌다.
엄마의 순간, 나의 순간, 그리고 딸의 순간
모두가 하나로 이어진 듯했다.
잠시 후 병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향해 있음을 느꼈다.
나만 사연 많은 여자 티를 내며
눈치 없이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이 예쁜 아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리라.
할머니가 내게 그러셨듯 나도 이 아기의 바람막이가 되어 주리라.
그리고 3년이 흐른 뒤 딸이 둘째로 아들을 낳을 때 나는 초대받지 못했다.
“엄마는 너무 울어서 안 돼”
딸이 농담으로 말하며 웃었다.
그 시간에 나는 딸의 집에서 신성하게 태어나 나를 울렸던 보물 같은 손녀를 보느라 바빴다.
그로서리를 그만두고 심심해하던 나에게 딸은
“엄마 조금만 기다려 손주가 있으면 재밌을 거야”
하고 말해왔었다.
이젠 이대로 재미없이 살면서 늙어가겠구나
했었는데 손주들을 보면서 나는 다시 펼쳐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인형같이 예쁜 아기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보는 것도 아까웠다는 표현이 맞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커가면서 나날이 예뻐지고 똑똑해졌다.
남편의 60번째 생일을 맞아 온 가족이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을 갔다.
그때 손녀가 5살쯤이었다.
빙하 폭포를 구경하기 전에 직원이 빙하의 역사와 여러 가지를 안내했다.
남편과 내가 화장실에 갔다가 나왔더니 손녀가 우리를 직원이 안내하던 강단으로 데려갔다.
손녀는 그 근처에 있는 사람들을 다 몰아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설명해야 하니까 다 비키라고 정색하며 말했다.
사람들이 귀여워서 웃으며 다 비켜줬다.
손녀는 직원이 설명했던 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외워서 우리 둘에게 설명했다. 뒤에 앉아 있던 노부부가 박수를 쳤다.
“너 때문에 나도 많이 배웠다”
고맙다고 손녀에게 말했다.
우리는 그날 왕 대접을 받았다.
손녀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서 똑같이 사람들을 비키게 하고 설명했다.
손녀는 언제나 책을 들고 다닌다.
“할머니 우리가 걸을 때 몇 개의 뼈가 움직여야 하는지 아세요?”
“206개의 뼈를 움직여야 해요”
손녀는 한국어를 하나씩 배우고 있다.
우리와의 원활한 소통을 위하여...
하나의 문이 닫히고
새로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