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답노트의 재구성 2화

새롭게 쓰는 31살의 여름

by 하얀 나비
딸 사진에서 슬쩍


남자가 먼저 침묵을 깼다.

“너 그때… 내가 보낸 문자 정말
못 본 거야? 아니면 보고도 씹은 거야?”

“문자라니? 너 그냥 자전거 타고
가버렸잖아."


13년 전, 우리는 마침표를 찍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였다는 것을, 우리가 억지로 덮어버린 오답 노트의 다음 장이 아직 남아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너, 아직도 민수 연락처 가지고 있어?"


"아니, 걔 이름을 여기서 왜 꺼내?"


나는 날카롭게 반응했다. 민수. 13년 전 우리 사이를 가장 날카롭게 파고들었던 그 이름. 내 생일에 그가 아닌 민수가 먼저 케이크를 들고 찾아왔던 그날, 그리고 그 일로 미친 듯이 싸웠던 그 비 내리던 하굣길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날 말이야. 비 오던 날 내가 자전거 타고 그냥 가버렸던 날."


그의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었지만,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실 민수가 나한테 그랬거든. 너 좋아한다고. 친구 사이에 상도덕 없게 나보고 빠지라고... 열여덟의 나는 네가 나를 믿어주는 것보다, 친구한테 뺏기지 않는 게 더 중요했던 멍청이였어. 그래서 너한테 더 모질게 굴었나 봐. 걔한테 지기 싫어서."


13년 전의 우리는 사랑을 지키는 법보다 자존심을 지키는 법을 먼저 배웠다.
남자는 이제 비를 피할 지붕(차)을 가졌지만, 나는 그 지붕 아래서 비로소 13년 전 내가 맞았던 비가 얼마나 차가웠는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춥게 떠났는지를 깨달았다.


열여덟의 여름은 습했고, 우리의 자존심은 그보다 더 팽팽했다.
열여덟 살 비가 쏟아지는 편의점 앞, 고작 가로세로 한 뼘도 안 되는 좁은 처마 밑에 우리 둘은 어깨를 맞대고 서 있었다.


그의 젖은 교복에서 나는 눅눅한 냄새가 좋아서 나는 자꾸만 그의 팔에 내 팔을 부딪쳤다. 하지만 그는 아까부터 굳은 표정으로 핸드폰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민수 연락이야?”


내가 묻자, 그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거칠게 쑤셔 넣으며 나를 내려다봤다. 평소보다 서늘한 눈빛이었다.


“넌 민수가 그렇게 좋냐? 아까 체육 시간에도 걔가 주는 물 마시더라.”
“... 뭐? 야, 민수는 그냥 네 친구잖아. 목말라서 마신 게 죄야?”


“걔가 너 보는 눈빛, 너만 몰라. 아니, 알면서 즐기는 거야?”


그 말은 독이었다. 민수가 내 뒤에서 내 가방을 대신 들어주고, 등굣길에 내 초콜릿을 챙겨주던 그 무수한 호의들이 사실은 그에게 지독한 모욕이었다는 걸, 나는 그때 알지 못했다.

민수가 그에게 <나 사실 얘 좋아한다.> 너보다 내가 더 잘해줄 자신 있어라고 선전포고를 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말을 왜 그렇게 해? 내가 뭘 즐겼는데!”


“민수가 그러더라. 너랑 나, 안 어울린다고. 자기가 옆에 있는 게 너한테 더 나을 거래.”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자전거 핸들을 꽉 쥐었다. 마디마디 툭 불거진 그의 손등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는 그가 나를 위해 민수와 싸워주길 바랐다.


“그 앤 내 여자니까 넘보지 마”

라고 멋지게 말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열여덟의 그는 질투에 눈이 멀어 나를 밀어내는 오답을 선택했다.


“그래서? 걔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래서 지금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야?”


“어, 맞는 것 같네. 나처럼 친구랑 여자 하나 사이에서 갈등하는 멍청이보다, 너한테 직진하는 걔가 훨씬 낫겠다.”


“... 뭐라고?”


“헤어지자고.

민수한테 가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해.”


그는 내가 붙잡을 틈도 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아 빗속으로 돌진했다.
《가지 마!》라고 소리쳐야 했던 입술에선, 못된 자존심이 대신 튀어나왔다.


”그래! 네 고집대로 해! 나도 너 같은 애 싫어”


빗물에 섞여 들어간 내 외침이 그의 등에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멀어지는 낡은 자전거의 체인 돌아가는 소리가, 우리 사이의 마지막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소리처럼 들렸을 뿐이다.


빗속을 달리는 차창 너머로 마치 커다란 스크린이 켜진 것 같았다. 와이퍼가 오갈 때마다 우리들의 서툴고 풋내 나던 청춘이 영화처럼 상영되고 있었다.


그땐 몰랐던 이제야 보이는 장면들. 알 수 없는 미래, 젊음 말고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던 시절.


서로를 사랑했지만 표현이 서툴렀고 상처받는 게 두려워 도망을 쳐야만 했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주고받고 헤어짐이라는 뜻하지 않은 결과에 이르렀지만 알량한 자존심이 뭐라고 무릎을 꿇지 못했다.


차는 어느새 내 자취방 앞 골목에 멈춰 섰다. 13년 전, 그가 나를 내려주던 대문 앞과는 사뭇 다른, 낯선 빌라의 주차장이었다.
집 앞에 도착해 차 문을 열려는 나를 그가 불러 세웠다.


"번호, 그대로야?"


"아니, 바뀌었어. 010으로 바뀔 때.”


그는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럼 찍어줘. 우리 아직 오답 노트 다 안 읽었잖아. 이제 겨우 첫 페이지 넘겼는데, 이대로 끝내면 좀 억울해서."


오답 노트. 내가 속으로만 삼켰던 그 단어를 그가 내뱉었을 때, 13년이라는 시간의 벽이 한순간에 허물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의 핸드폰에 내 번호 11자리를 눌렀다.


나는 짐짓 담담한 척 대답했지만, 심장이 다시 세탁기 통처럼 덜덜거리기 시작했다. 액정의 밝은 빛이 우리 사이의 어색한 공기를 비추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뒷좌석에 있던, 오는 내내 신경 쓰였던 그 꽃을 내게 건넸다.


"이건 너를 위한 거야."


그가 건넨 꽃다발은 사과의 향기가 났다. 아니, 어쩌면 13년 동안 전하지 못한 미안하다는 문자가 꽃의 형상을 하고 내게 온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가 건넨 꽃다발을 가슴에 꼭 안았다. 그의 서툴렀던 18살의 고백이 담긴 분홍색 뭉치.


"데려다줘서 고마워."
"연락할게. 비 오는데 조심히 들어가고."


차 문을 닫고 빌라 공동현관으로 뛰어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의 나는 아까보다 훨씬 더 엉망이었지만 화장을 안 하고 머리가 비로 젖어도 18살 때보다 더 성숙하고 아름다운 내 모습은 여전히 눈이 부셨다.


13년 만에 처음으로, 비 오는 날이 싫지 않았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손에 든 핸드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로 온 문자 한 통.


《13년 전, 내가 못 보냈던 문자 자금 보낸다. 늦어서 미안》


그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눈물과 함께 내 31살의 여름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 어젯밤 피곤했던 주인공 배우들과 긴 회의 끝에 키스신이나 베드신이 없는 조건으로 작품성이 없는 작품이지만 해보겠다고 하여 다시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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