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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트바스 Feb 16. 2022

찌질한 자주여성의 고백

스스로 자주여성이라고 생각해왔다. 적어도 3년 전까지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그런 나의 몸속, 마음속, 머릿속 어딘가에 사는 또 다른 나 자신들이 듣는다면 '자유의지는 존재한다'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시위라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눈과 귀가 있어 현실세계를 사는, 대략 2만 제곱센티미터의 겉넓이를 가진 내 육체가 하는 일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면 차마 그러지 못할 것이다.


할 일이 많을 때는 여지없이 딴짓이 하고 싶어 진다. 자유의지 이론 빗대어 말하면 이미 과거에 즐거웠던 딴짓의 경험이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뇌를 자극한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뇌와 손가락이 따로 놀며 실컷 딴짓을 하고 보면 내가 왜 이러나 싶다. 문제는 이거다. 즐거웠던 딴짓의 경험이었다면 유쾌했어야 마땅하다. 사실상 특별히 의미도 재미도 없는 일인 것을 빤히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따금씩 괴로워진다. 이를테면 어젯밤, 재미도 없는 드라마 틀어두고 누워있기라던가, 그렇게 연달아 세 시간을 가만히 누워있기라던가.


"또 드라마 봐?"


어김없이 그 애가 묻는다. 요즘 가장 웃기다고 생각하는 질문이다. 드라마나 영화나 그게 그거지. 꼭 물어보고 영화라고 하면 아무 말도 안 하고, 드라마라고 하면 왠지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보낸다. (요즘은 질문의 선택지가 하나 더 늘어서 넷플릭스 인지 물을 때도 있다) 엉망인 영화도 많은데 어째서 영화만 이런 좋은 대우를 받는지 모르겠다. 예술성의 문제인가. 그러고 보면 에세이도 드라마의 영역과 비슷해 보인다. 시나 소설은 문학으로 대우받고 에세이는 아직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역시 예술점수가 부족하다는 통념 때문인가 하고 짐작해본다. 언젠가는, 아주 언젠가 기품 있는 생활문을 쓰고 싶어 진다. 여기서의 기품은 예술성을, 생활문은 에세이를 빗댄 말이다. 


"내가 드라마 재미있어서 보는 거 같아?"


예술성을 따져 물어봐야 아무 소용없는 것을 안다. 30분 이상 스트리밍 되는 영상물에 관심 있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그 애도 그냥 묻는 거다. 비난하려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고믿)으므로, 그저 관심의 표현으로 여긴다. 때로는 짜증이 나긴 한다. 나도 그냥 아무렇게나 말해본다. 


"그럼?"

"재미없는데 그냥 틀어 놓는 거야. 네가 내 기분을 알기나 해?"

"넌 구박하는 사람도 없잖아"


어이가 없다. 네가 구박하잖냐. 아무 자극도 없는 삶에 대해 네가 알기나 하냐. 정체도 모를 자극에 따라 있는 줄로만 믿었는 자유의지를 침해당하고,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내 몸뚱이를 네가 알기나 하냐고. 단단히 자기 자신을 채워가는 일을 하면서, 덩어리 시간을 내 글도 쓰며 새로운 세상을 꾀하는 직장인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도 안 하고 글도 안 쓰는 내가 입을 엄청난 타격감 같은걸 네가 알기나 하냐고.


아무래도 세상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와 수십, 수백의 몫을 해내는 자들만이 공존하는 것 같다. '자기 할 일은 하는 애'라는 칭찬을 듣고 자라(엄마가 딱 한번 말했다) 나는 그 점에 대해 좀 우쭐대며 살았는데, 딱 일 인분의 몫만을 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찾기가 힘들다. 어쩌면 그래서 여전히 세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는 오늘도 일 인분의 몫을 위해, 아니 그딴 게 뭐가 중요한가 언젠가 수십의 몫을 해낼 날이 오겠지 생각하며 가만히 누워본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내가 왠지 찌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멋있는 척해보려고 해도 멋진 구석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고 있지도 않으면서 '척'을 할만한 깜냥이나 재능도 없다. 휴. 이렇게라도 인정하고 나니까 속이 편안하다. 틈만 나면 잘난 척하고 싶어 안달이 났었던 지난날의 나에게도 자비를 베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고 늘어져 보자. 누구나 찌질한 구석 조금씩은 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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