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찰떡궁합 필기구를 찾아서
1.
며칠 전, 2015년에 방송된 <라디오스타>를 우연히 본 적이 있다. 탤런트 심형탁은 소문난 도라에몽 마니아로 소개된다. 그는 도라에몽과 관련된 것이라면 돈을 아까지 않는다. 반면 옷에는 영 관심이 없어서 평소 트레이닝복 네 세트만 가지고 돌려 입을 정도다. 반대로 함께 패널로 등장한 작곡가 주영훈은 옷을 사랑해서, 모든 소비를 옷값으로 치환해 생각한단다.
사람마다 어떤 부분에서는 양보하지 못하는 분야가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옷, 또 어떤 사람에게는 도라에몽이듯, 내게도 그런 종목이 몇 개쯤 있다. 그중 하나가 필기구다. 옷이나 가방보다는 왠지 필기구에 더 눈길이 간다. 수집광은 아니지만, 어쩐지 종이와 펜을 고를 때는 신중해진다. 좋아하는 필기구를 쓸 때, 왠지 기분도 좋고, 글도 더 예쁘게 써지고, 좋은 아이디어가 더 많이 샘솟는 것 같은 기분! 나뿐만은 아니지 않을까..?
한국에서 '노노재팬'을 외치던 시절, 국내 문구 커뮤니티를 둘러보다 "다른 건 다 몰라도 오토바이와 필기구만큼은 대체품이 없다"라는 말을 발견한 적이 있다. 생각해 보면 나는 특별히 일본의 제품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도, 내 스쿠터는 '하우즈 스즈키'라는 브랜드를 달고 있었고, 자주 쓰는 펜은 일본 미쓰비시사의 제트스트림이었다. 일본에 사는 지금, 필연적으로 내 필기구는 모조리 일제(日製)가 되었다.
* 하우즈스즈키의 대만의 하우즈, 일본의 스즈키사가 만든 기술제휴 브랜드다.
2.
일본에 와서 처음 구매해 한동안은 무인양품(無印良品, 무지 혹은 무지루시로 불린다)의 젤펜과 미쓰비시의 스타일핏을 색색으로 구비해 사용했다. 그다음 쓰기 시작한 것은 파이롯트의 주스업(Juice up)이다. 한 자루를 다 사용하는 동안 손잡이 부분 고무가 다 해졌고, 다른 펜이 있는데도 왠지 새로운 펜을 구매하고 싶어 져 동네 로프트(Loft, 일본의 대형 문구, 잡화 편집숍)의 펜 코너를 자주 어슬렁거렸다.
고급 볼펜류가 아니라면 보통 한국돈 1~2천 원이면 펜 한 자루를 거뜬히 살 수 있지만 왠지 신중해진다. 어쩔 수 없이 검증된 주스업을 집어드는 순간, 하이테크가 눈에 띄었다. 무려 20여 년 전에 쓰던 펜이 여전히 건재하고 있었다니. 하이테크는 얇은 펜으로 유명했는데, 중학생시절 친구가 쓰던 것을 보고 나도 따라 사서 쓰던 기억이 난다. 대단히 얇고 사각이는 필기감이 좋았었더랬다.
그 시절 꽤나 고가이기도 하고, 자주 고장 나는 펜이어서(떨어뜨리면 90% 이상의 확률로 펜이 망가진다) 검은색, 빨간색만 겨우 한 두 자루 사서 쓰곤 했다. 하이테크라는 이름처럼 왠지 고오-급 기술이 집약된 것만 같던 그 시절의 하이테크. 사실 그 옛날에는 펜 뚜껑에 정가 100엔을 뜻하던 [100]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던 것 같은데, 이제는 [200]이 된 것을 보고 새삼스러워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 자루에 무려 1,000원이 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2,000원이 된 것이다.
그렇게 반갑게 내 손으로 들어온 하이테크. (정확하게는 HIGHTECT-C다) 필기구의 세계에도 뽑기 운이라는 게 존재해서, 가끔은 잉크가 잘 나오지 않아 조금은 아쉽긴 하지만, 여전히 건재함이 느껴진다. 하이테크의 상위버전이 주스업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분명한 하이테크만의 매력이 좋다. 노크식이 아니라 별도의 뚜껑이 있어 불편하기도 하고, 연약한 펜촉도 여전하지만, 클래식한 디자인과 여전히 사각이는 이 느낌! 근 20년 사이 하이테크를 뛰어넘는 하이테크놀로지(High technology. 첨단기술) 펜들이 많이 등장했겠지만, 이만하면 다음 펜쇼핑에서도 여전히 하이테크를 골라도 되겠다 싶다. 내 5mm 격자무늬 노트와 하이테크는 진짜 찰떡궁합이다.
PS.
한국 오프라인 문구점에서의 하이테크는 3,500원~4,000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1,500원 대로 저렴하게 판매하는 온라인 샵도 곳곳에 포진해진다. 잉크펜 '정착템'을 찾지 못했다면 한 번 사용해 보시길! 2023년의 1,500원짜리 펜은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니니까!
PS 2.
최근에 읽었던 흥미로운 책이 있어 같이 소개한다. <문구의 과학>이다. 각종 문구류의 과학적 원리와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책으로 아주 가볍게 읽기 좋다. 연필, 만년필은 물론이고 수정테이프나 접착제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일본의 문구다. 일본의 것만을 다루지는 않았지만 일본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물론 일본인이 저자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왜 '일제 문구'의 기술력이 좋은지 짐작이 간다. 책에서 본 그 역사에 빗대에 볼 때 일본인 특유의 집착, 그러니까 그들의 말로 곤조(こんじょう, 根性)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짐작한다. 아주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개선하려는 노력 말이다.
이를테면 샤프사(社)에서 60여 년 전에 샤프를 발명한 이야기라던지, 지워지는 볼펜(파이롯트), 샤프심이 뭉뚝해지는 것을 방지해서 계속 뾰족하게 쓸 수 있는 샤프(미쓰비시연필의 クルトガ. 쿠루토가 또는 쿠루토가로 불린다)를 발명한 이야기는 놀랍다. 특히 쿠루토가는 어쩌면 별거 아닌 것 같은, 개선할 수 없을 것 같은 불편함(샤프심이 뭉뚝해진다는 불편함)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이렇게까지 고성능의 샤프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PS 3.
쿠루토가는 다이브라는 이름으로 작년(2022년)에 신제품이 발매되었는데, 한국정가로 무려 99,000원(엔화로 5,000엔), 한때는 중고가로는 수십만 원을 호가했다고 한다 한다. (만원 이하 제품도 물론 있다) 샤프심을 뾰족하게 유지하면서, 노크할 필요 없이 자동으로 나오는 오토메틱기능, 거기에 개인의 필압이나 필기속도에 따라 샤프심이 나오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되었다. 200엔짜리 하이테크 가격을 논해보려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몇십만 원짜리 샤프라니. 정말 문구의 세계는 끝이 없다.
PS 4.
언젠가 동아(dong-a, 동아연필)의 회원으로 신제품이 나오면 우편으로 받아 써보곤 했던 기억이 났다. 동아연필 잘 있나?! 동아, 모닝글로리, 모나미, 문화와 자바 그리고 결은 좀 다르지만 네오까지. 한국의 문구 브랜드도 세계로 진출해서 더욱 이름을 떨쳐주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