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을 깨닫고 나서야 보이기 시작한 것들

by 한재

하얀색 상의를 꺼내던 중 옷장 한 켠에 쌓여있는 옷들이 보였다. 알파벳이 적힌 분홍색 맨투맨, 체크무늬 스웨터, 반으로 접힌 청바지. 몇 달째 손을 대지 않은 옷들이었다.


반면 매일 같이 입던 옷들은 행거에 걸려있었다. 모두 편하고 넉넉한 옷들이었다. 그 모습에 멈칫했다. 어느새 나는 작고 불편한 옷은 입지 않고, 몸에 맞는 편안한 옷을 입고 있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일어난 변화에 낯설어졌다. 곧 고개를 돌리고 집을 나섰다.


학교에 도착해 강의를 듣고 점심을 사러 편의점에 갔다. 삼각김밥을 집고 계산대에 가져가려는데 옆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이거 칼로리 140밖에 안 된다?”

“근데 난 제육이 좋은데.”


다시 위화감이 들었다. 습관처럼 확인하던 칼로리를 보지 않고 음식을 고르고 있었다.


따뜻하게 데운 김밥을 먹으며 정신은 과거로 흘러갔다. 오랜만에 삼각김밥을 먹었던 때였다. 어색하고 긴장한 채 비닐조차 제대로 뜯지 못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날 나는 목이 퉁퉁 부어있었다. 전날 토했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무아지경으로 음식을 밀어넣고 위가 더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채워졌을 때 화장실에서 속을 비워냈다. 그리고 차가운 타일 위에 앉아 생각했다.


‘더는 못하겠어. 정말 끊어야지.’


짙은 탈력감과 비참함이 배어 있었다. 끝없는 수렁에 빠졌던 그 순간에서 지금의 나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영향을 주었을까 생각했다.


문득 폰을 들여다봤다. 메모장엔 빼곡히 적혀 있는 글들이 있었다. 그 문장들은 모두 한 가지와 관련되어 있었다. ‘존엄’이었다. 나는 존엄을 느끼고 깨닫기 시작한 이후, 모든 생활이 변했다.


의류 매장에서 입어본 옷이 맞지 않았을 때, 다른 사람의 말이 내 몸을 향했을 때 존엄은 의식하지 못한 채로 가슴 속에서 반응했다. 온몸의 근육이 수축하고 눈가가 시큰거리며 입술이 굳게 다물리는 감각.


동시에 비난이 외부가 아닌 내부를 향하는 그 순간들은 반복되고 쌓여 결국 존엄을 일깨웠다.


이름 붙이지 못하던 감각에 가까스로 이름을 붙이자 그제야 명쾌해졌다. 왜 난 그렇게 아팠는지, 왜 내 잘못이라고 여겼는지, 왜 자신에게 가혹하게 굴었는지. 눈을 감싼 껍질이 한꺼풀씩 벗겨졌다.


마른 몸, 뚱뚱한 몸 모두 사람의 몸이고 외모는 사람의 가치와 바꿀 수 없다. 나는 사람이므로 재단될 필요가 없다.


그 이후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에 귀 기울였다. 삼각김밥을 고를 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작고 끼는 옷이 아닌 넉넉한 옷을 입으며, 사진 속 연예인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다.


아직도 예전의 습관들이 잔재하지만 점차 흐려져 간다. 흔들리고 깨지는 날은 필연적으로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존엄이 있는 한, 방향을 잃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