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이 선택이 아닌 시간이 될 때

by 문단

버틴다, 기다린다, 포기하지 않는다.

이 말들은 일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때 등장한다.
앞이 불투명해지고, 설명할 말이 줄어들수록
사람들은 이 말들로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언어를 만든다.



기다림에는 보통 여지가 있다.
조금 더 지나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기대,
지금은 아니지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

이때의 기다림에는 선택이 남아 있다.
그만둘 수도 있고, 방향을 바꿀 수도 있으며,
적어도 지금의 상태가 전부는 아니라는 감각이 유지된다.


그러나 모든 기다림이 그런 것은 아니다.

결과는 점점 멀어지고, 시기는 이미 지나갔으며,
남은 것은 선택이 아니라 빠져나올 수 없는 시간뿐인 경우도 있다.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고,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상태.

그런데 우리는 이 시간까지도 같은 말로 부르기도 한다.
기다린다. 버틴다. 포기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언어는 현실을 가리기 시작한다.
선택이 사라진 기다림을
마치 의지의 문제인 것처럼 설명하기 때문이다.

버틴다는 말은 노력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다른 선택이 허용되지 않았던 시간을
그럴듯하게 견디고 있다는 설명에 더 가깝다.

그 말을 붙이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시간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다림을 미화한다.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견뎌냈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 선택이 옳았다는 사실은 전혀 다른 문제다.

때로는 포기하지 못한 것이
가장 결정적인 판단의 실패였을 수도 있다.

선택이 남아 있는 기다림은 조정이 가능하다.
반면 선택이 사라진 기다림에서는
방향이 아니라 한계만 남는다.

얼마나 더 견딜 수 있는지가 기준이 되고,
그 순간 기다림은 과정이 아니라 조건이 된다.
살아 있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상태 말이다.

이미 그 안에 있어 본 사람들은 안다.
그 시간 안에서는
노력하라는 말도, 조금만 더 버티라는 말도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그래서 묻고 싶다.
우리는 지금 선택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선택할 수 없는 시간을 지나고 있는가.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채
모든 기다림을 같은 말로 부르는 순간,
언어는 위로가 아니라 현실을 가리는 장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