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꿉친구

by 봉북이

안녕! 내 이름은 최소정! 올해 중3이 되는 미술 입시생이다. 예체능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겐 이 시기가 중요하다. 체육을 하는 애들은 체고 준비를 더 많이 할테고, 나 같이 미술을 하거나, 아니면 음악, 무용 같은걸 하는 애들은 예고 준비를 하느냐 바쁘겠지. 솔직히 여기까지만 해도 별로 특별하진 않다. 그냥 평범한 미술 입시생 여자애니까. 하지만 좀 더 특별한게 있다면.. 바로 나에겐 무려 10년지기 소꿉친구가 있다! 이거 갖고 뭐가 특별하냐고? 암! 특별하지! 내 또래의 애들한테 물어봐라. 혹시 10년지기 소꿉친구가 있냐고. 거의 없다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있지! 내 유일한 남사친이자, 가장 편한 사람! 난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내 10년지기 친구에게는 아무에게나 털어놓지 않는 고민도 잘 털어놓는다. 그런데…. 여기서 더 특별한걸 알려주자면.. 나는 그 소꿉친구를… 짝사랑 중이다! 이 미친 짝사랑은 벌써 8년을 맞이했다.. 2년만 더 짝사랑하면 짝사랑도 10주년을 맞이한다는 뜻이지… 이런 생각을 할때마다 내가 참 미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에 8년치 짝사랑이라니.. 만약 마음을 팔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내 짝사랑은 억대가 나올 정도로 비쌀 것이다. 그야 8년이나 숙성했으니! 와인도 많이 숙성할 수록 비싸지 않는가? 같은 원리지. 어쨌든! 그렇게 8년동안 짝사랑을 했지만, 도저히 내 소꿉친구는 내게 마음을 줄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정말 날 그냥 편안한 소꿉친구 여자애로 생각하는 건가.. 아 참! 생각해보니 내 소꿉친구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네. 내 8년 짝사랑의 주인공.. 10년지기 소꿉친구의 이름은.. 김지한이다! 짝사랑을 하기 전에는 그냥 남자애 같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 이름조차도 멋지게 들린다.. 참.. 이런 미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초반엔 잘생긴 연예인을 보거나, 학교에서 인기가 많다던 남자애들을 좋아하는 척도 해봤다. 하지만, 내 짝사랑은 식을 줄 모르는, 아직 한참 구워지고 있는 중인 요리인지, 시들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짝사랑을 자를 계획은 물거품이 된지 오래, 이젠 그냥 고백 타이밍이나 잡고 있다. 김지한과 놀러 갈때 맨날 약속 장소를 일부러 분위기 좋은 곳으로 잡지만, 묘한 분위기가 흐르기 직전에 김지한은 분위기를 깼다. 예를 들어..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하아암.. 피곤한데 이제 좀 갈까?”


이런 식으로! 이런 것도 한두번 해야 참지, 만날 때마다! 분위기가 로맨틱적으로 바뀔 때마다! 저러니 내가 어떻게 참는가! 그래서 다른 방법들을 생각하던 어느날, 나는 엄청난 방법을 떠올렸다. 바로 하굣길! 우리 하굣길은 분위기가 꽤나 좋았다. 물론 처음 보는 사람들 한정이다. 학교에 맨날 등교하면서 같은 하굣길을 다니다보면 그 풍경조차도 익숙해진다. 그러면 김지한도 같이 하교할 때는 도망치지 못하지 않을까? 그렇게 난 하굣길 작전을 세웠다. 하지만.. 김지한은 이번에도 피하기 시작했다..!!! 친구랑 같이 가야한다.. 동아리 일이 있다.. 학원 먼저 가야한다.. 하지만 그게.. 하루 이틀이 아니였다! 하루 정도는 봐줄 수 있다. 하지만 그 하루가 이젠 한달이 됐다! 이런! 나는 짝사랑 때문에 이러는거기도 하지만, 친구로써도 이건 아니지 않나? 분위기가 바뀔 땐 가는걸 조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옛날엔 같이 하던 하교를 저렇게! 이건 친구로서 긴급회의를 해야하는거다! 10년지기인데! 소꿉친구인데! 오늘 진지하게 김지한에게 뭐라 해야겠다..

그렇게 수업 종이 쳤다. 다른 아이들에겐 해방의 종소리겠지만, 나에게는 전투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그리고 난 급했다. 원래라면 같이 하교해서 집까지 가고, 집에서 빨리 준비한 후에 미술학원에 가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계획에 조금 차질이 생겼으니, 회의는 최대한 빠르게 진행해야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김지한의 반에 찾아가 문을 쾅 열고 크게 소리쳤다.


“김지한!! 따라나와!”


내 우렁찬 목소리에 김지한 반 아이들의 모습은 마치 사자를 본 가젤 마냥 움츠러들어있었다. 하지만 그런건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 내 목소리를 듣긴 들은건지 귀에 꼭 쓰고 있던 헤드셋을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벗으며 고개를 돌리는 김지한! 그 모습에 화가 났다. 차라리 반 아이들처럼 쫄기라도 하면 기선제압을 성공한 것 같아 기뻤을텐데!


“왜?“


저 무심한 목소리! 내가 왜 저런 애를 좋아하게 됐을까? 정말 생각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만 두고 싶다고 큰 소리쳐도 내 맘은 명령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짝사랑을 그만둘 순 없다. 저렇게 무심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것 같은 눈치없는 김지한을 아주 자지러지게 만들테야!


“잠깐 얘기 좀 해!”


장소도 알려주지 않은 채 나는 나랑 김지한만이 아는 곳으로 쿵쾅쿵쾅 걸음을 옮겼다. 그 곳은 어릴 때 우리가 부르던 ‘비밀의 산책길‘이였다. 크면서 비밀의 산책길이라 하려니 좀 오글거려 그냥 이름을 부르지 않기로 했다.

내가 먼저 도착하고 약 3분 뒤, 김지한이 도착했다. 김지한은 말을 먼저 하는거 대신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나는 한발자국 크게 다가가 잔뜩 째려보고 말했다.


“너 요즘 왜 나 자꾸 피해? 원래 나랑 하교도 잘 해주면서 요새는 안 해주잖아!”


김지한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무덤덤한 표정으로 날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더 화가 났다! 난 이렇게나 심각한데, 넌 심각하지 않아? 이건 정말 짝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너와 내 우정의 문제가 아니야? 더이상 나는.. 너에게 친구보다 못한 존재가 된거야?


“대답해! 왜 자꾸 피하냐고!”


나는 나도 모르게 서운한 마음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들려온 김지한의 대답은 충격이였다.


“불편해. 너랑 하교하는거.”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몸이 굳을 수 밖에 없었다. 불편하다니.. 내가 둘이 놀러갈 때마다 묘한 분위기를 자꾸 만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김지한의 우정이 그냥 날 떠나버린걸까? 내 머릿속과 마음은 처음으로 일치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 관계, 더 이상 살릴 수 없을 것 같다.‘


모든 신경들이 만장일치하자, 나는 성큼 다가갔던 발걸음을 뒤로 뺐다. 그리곤 고개를 푹 숙였다. 왜냐면 눈물이 흐를 것 같았기에,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눈물이 터지기 직전에 달려나갔다. 뒤에서 김지한의 목소리가 조금 들린 것 같았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아까 했던 말보다 더 확실하게 선을 그을려는 말? 손절하자는 말이면 어쩌지? 나는 그렇게 뛰어 나도 모르게 집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가자 엄마가 큰 목소리로 날 꾸짖었다.


“너 왜 지금 오니!! 학원 늦게 생겼잖아!!”


뭐라고 하고 싶었다. 내가 늦고 싶어서 늦은게 아니라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 있었다고.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한 마디 뿐이였다.


“… 죄송합니다..”


그렇게 계속 혼잣말 같은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며 미술학원에 갈 준비를 했다. 미술학원에 갈때도 급히 뛰어갔지만, 20분이나 지각해버리고 말았다. 원장쌤은 나를 싸늘하게 내려다봤고, 나는 쭈굴해지며 사과만 했다. 하지만 원장쌤은 얄짤 없이 내게 손바닥을 대라 했고, 자로 4대를 맞았다. 손이 얼얼했다. 평소같은 날엔 그냥 무덤덤했겠지만, 오늘은 고통이 더 많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울 수 없었다. 평소처럼 실기실 안으로 들어가 이젤을 피고 그림 그릴 준비를 할 뿐.

미술학원이 끝나고 나서도 너무나 우울했다. 평가를 받을 때도 나만 잔소리를 듣고, 비교를 당했고, 시험을 본 그림은 오늘따라 내 마음에 차지 않았다. 나는 지하철로 들어가면서 훌쩍였다. 오늘 하루는 너무나 최악의 최악이였기 때문이였다. 나는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그래서 지하철 안 편의점에 가 과자들을 잔뜩 사고 지하철 벤치에 앉아 과자들을 우걱우걱 먹었다. 나쁜 김지한.. 진짜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심한 말을.. 으으!! 나는 과자를 더 세게 씹으며 발을 팍팍 허공에 찼다. 너무 화가 났다. 분명 김지한을 싫어야해야 하는데, 또 마음 한 구석에서는 김지한을 좋아하는 마음이 시들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진짜 싫어…”




내 이름은 김지한, 그리고 내게는 10년지기 소꿉친구가 있다. 그 애는 처음엔 그냥 편한 여사친이였다. 소꿉친구였기에, 고민을 털어놓거나 나만 아는 비밀을 걔한테만 알려주었다. 소정이는 입이 무거워서 좋았고, 부모님에게 호되게 혼난 날이면 소정이에게 연락했다. 소정이는 엄청난 리액션으로 내 편을 들어주었다. 부모님에게 혼나는 일 말고도 다른 일들에도 소정이는 마치 자신의 일인 것 마냥 반응 해주었다. 그런 소정이가 정말 편하고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에서 공부하는 중에 내 친구인 리아가 갑자기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지한아~ 너 소정이한테는 팔짱도 껴주고, 어깨동무도 하고.. 포옹도 해준다며~ 나도 해주라~”


맞는 말이였다. 서로 장난스럽게 발을 맞추며 팔짱을 낀 채 걷기도 했고, 키 차이가 꽤 나지만 내가 낮춰 어깨동무를 해본 적도 잦았다. 서로 힘든 일이 있을땐 포옹을 해주며 말 없이 서로를 다독였다. 그럴때 난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함, 기쁨이 느껴졌다. 그런데 리아가 하니 불편하고 어색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리아의 팔짱을 뺐다.


“아.. 걔는 10년지기 소꿉친구라서..”


나도 갑자기 내가 왜 팔짱을 꼈는지 몰랐다. 머릿속에서는 복잡하게 말들이 엉켰지만, 정작 내 입 밖에 나온 말은 단순했다. 그리고, 나에 대해 말 안 한게 있어 말하자면, 나는 사실 마음 속으로는 생각들이 정말 엉킨 실들처럼 섞여 있다. 저녁 뭐 먹지? 마라탕은 매울 것 같은데.. 그래도 먹고 싶은데! 아니야 먹지 말자 배 아파. 싫어 먹을래! 대충 이렇게, 생각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듯이 엉커져 있다. 하지만 입 밖으로는 머릿속에 있는 말들을 꺼내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꺼낸다. 머릿속에서 마라탕을 먹고 싶다고 결론을 지었지만, 입 밖으로는 무심한 목소리로 “마라탕 말고, 국밥이나 먹자” 이렇게 나온다. 나도 왜 그런지 몰랐다. 그냥.. 고쳐지지 않았다.

그런 나는 소정이와 있으며 조금 편했다. 머릿속에 있던 생각들을 소정이에겐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소정이만 보면 자꾸 머릿속에 엉켜 있던 생각들이 얼어버린 것 마냥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입 밖으로는 더 엉뚱한 말들이 나왔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소정이를 좋아하는거라고 깨달은게. 그걸 깨닫고 나니 머릿속은 갑자기 더 엉켰다. 입 밖으로는 훨씬 더 엉뚱한 말들이 문맥에 맞지 않게 튀어나왔고, 목소리는 정말 무심해졌다. 하지만 속마음은 그것과 전혀 반대였다. 그런데 요새 소정이와 놀러갈때 묘한 분위기가 자주 흘렀고, 그것 때문에 나는 더 고장이 났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소정이를 피했고, 나도 모르게 소정이에게 무심해지기 시작했다. 하교를 같이 하자고 말하던 소정이의 말에도 나는 그저 피하기만 했다. 집에 도착하면 그런 내가 한심해 배게로 내 머리를 팍팍 치며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해도 내가 내뱉은 말들과, 무관심한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사단이 났다.

소정이가 날 비밀의 숲에 불렀을 때, 난 바보 같이 소정이가 불편하단 말을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심하게 속으로 소정이가 내가 말하고 싶은 진짜 의미를 찾길 기대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들도 잘 모르는걸. 하지만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었고, 소정이는 그대로 달려나갔다. 붙잡고 싶었다.


“자.. 잠깐만..! 소정아..!”


하지만 소정이는 그대로 사라졌고,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 앉았다. 멍청한 새끼, 한심한 새끼! 좋아하는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나는 오히려 크나큰 상처를 줘버리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연인 관계로 발전은 커녕, 친구라는 관계조차 아슬아슬했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나는 힘 없이 침대에 털썩 누웠다. 배게로 내 머리를 때릴 힘도 없었다. 그냥… 눈물이 났다. 그런데 가족들에게 울면서 고민을 털고 싶진 않아 침대에 얼굴을 박은 채 소리 없이 훌쩍일 뿐이였다. 왜 나는 솔직하게 말하지 못할까, 내 목소리는 왜 무심할까, 나는 이걸 고칠 수 있을까,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때, 내 방에 과일을 들고 있는 아빠가 들어왔고, 그대로 울고 있는 모습을 들켰다.아빠는 가족들에게 비밀로 해주겠다며 왜 우냐고 물어보았다. 난 머뭇거림 끝에 아빠에게 털어놓으려 했다.


“아뇨.. 그냥 성적이 안 좋게 나온 것 같아서..”


아, 이번에도 말이 이상하게 나왔다. 그 모습을 보는 아빠는 빤히 날 보더니 과일을 내 책상에 올려두고 말했다.


“넌 참 날 닮았구나. 머리에 생각한 대로 말하려 했는데, 입 밖으로 이상한 말만 나오지?”


한 방에 알아맞히는 아빠의 말에 나는 놀란 눈으로 아빠를 쳐다봤다.


“어떻게.. 아셨..”


아빠는 피식 웃으면서 과일 한 조각 집어 먹었다.


“나도 그랬거든. 특히 네 엄마랑 연애할땐 더.”


그렇게 아빠와 엄마의 연애 스토리를 듣게 됐다. 아빠도 나처럼 생각한 대로 말이 나오지 않아 고민이였는데, 그런 상태로 어쩌다가 엄마와 연애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연애는 사실 전에도 한 두 번 해보았지만, 그때 사귀었던 모든 여자들은 아빠의 말에 상처를 받아 헤어졌다고 했다. 그때 아빠는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아빠는 엄마에게도 모진 말을 내뱉었었다고 했다. 속마음에는 사랑해, 고마워 같은 말들을 생각했는데.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엄마는 아빠의 모진 말에도 변함 없이 웃어주었다고 했다. 그렇게 계속 연애하다 어느날 서로 조금 다투게 되었는데, 아빠는 그때 평소보다 더 상처 받을 말을 많이 내뱉었다고 했다. 그때 처음으로 엄마가 그 말에 울었다고 했다. 엄마의 우는 모습에 아빠는 어쩔줄 몰라 했고, 그렇게 어떻게든 달래다가 아빠가 엄마에게 말했다.


“근데 너는 왜.. 평소에 내가 하는 그런 모진 말에 웃는거야..? 지금은 이렇게 상처받고 울고 있으면서..”


아빠의 질문에 엄마는 훌쩍이며 대답했다.


“그야 그게 네 진심이 아닌걸 아니까.. 말은 그렇게 모질게 하면서도 네 행동 하나하나에 나에 대한 진심이 묻어났으니까..”


엄마의 대답에 아빠는 엄마에게는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서로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다 말하며 사이가 더 깊어졌다고 했다. 그렇게 며칠 후에 아빠가 먼저 프로포즈를 했고, 엄마는 받아주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여기에 이렇게 태어난거겠지. 내 동생 하루도.

아빠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나는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아빠도 나 같았다는게 믿기지가 않았고, 결국 이렇게 결혼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부러웠다. 나도 아빠와 엄마처럼.. 소정이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내 고민을 알아차린 아빠는 독심술사처럼 술술 말했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구나? 근데 네 말습관 때문에 사건이 터진거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끄덕임을 본 아빠는 수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럴땐 편지를 써봐. 말하는게 어려울 땐,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거든.”


아빠의 해답에 나는 정말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 일기를 쓸 때 나는 솔직하게 모든걸 적어내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일기 내용을 말하거나 발표하려 할땐 말이 또 이상하고 엉뚱하게 나왔다. 떡볶이를 먹어서 신났다, 라는 문장을 떡볶이를 먹었지만 별로였다, 라고 말해버린 적도 있었다. 나는 그날 밤, 아빠의 조언대로 소정이에게 편지를 썼다. 하지만 한장한장 완성할때마다 별로인 부분이 많았다. 글씨체가 이상해, 말한게 어색해보여, 이런 문장에 이런 단어들은 어울리지 않아, 등 많은 이유로 꾸겨진 종이들이 바닥과 책상에 쌓여나갔다.


“.. 다 썼다.”


드디어 완벽한 편지를 쓴 시각은 새벽 4시 32분이였다. 시간을 봤을땐 나도 나 스스로에게 참 놀랐다. 내가 이렇게까지 샜을때는 시험기간 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무식하게 편지를 써내려가는 내 모습을 되돌아보니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내 편지를.. 소정이가 과연 읽어줄까…

다음 날, 학교에 가장 먼저 도착해 소정이의 반으로 가 소정이의 책상 서랍 아래에 내 편지를 넣어두고 갔다. 소정이가 이 편지를 읽어주기를, 지금이라도 내 진심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최악의 하루를 보내고 난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망할 알람이 오늘따라 듣기 싫은 노래를 들려주면서 날 깨웠다. 나는 산발이 된 머리를 대충 묶고 아침을 먹은 뒤에 이빨을 닦고, 교복을 다 입고, 마지막으로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후에 등교했다. 내 반으로 들어가자, 몇몇 아이들은 내게 인사를 했고, 몇몇 아이들은 서로 떠들었다. 나는 웃으며 아이들을 반기고 내 자리에 앉았다. 내 친구들은 내가 앉자, 내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썰들을 풀거나, 오늘 점심 얘길 했다. 나는 그 얘기들에 하나하나 멋지게 반응하면서 수업 준비를 했다. 목을 쭉 빼들어 1교시가 어떤 과목인지 확인하고 책상 서랍에서 책을 꺼내려 손을 넣었는데, 책이 아닌 왠 작은 종이가 손 안에 들어왔다. 그 종이를 꺼내보니, 편지지가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깔끔해 보이는 편지지에는 정성을 들여 붙인 듯 보이는 실링왁스 스티커가 있었다. 그 스티커를 떼고 편지지 안에 있는 편지를 꺼냈다.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자 나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왜냐면 김지한! 김지한이였기 때문이였다! 이런건 아예 안 쓰는 앤데.. 내가 편지를 얼떨떨한 표정으로 보고 있자, 내 친구들은 뭣도 모르고 러브레터라며 내가 즐길 수 있게 자리를 피해주자~하며 가루처럼 사라졌다. 나는 조심히 편지를 읽었다.


[안녕, 소정아. 난 지한이야. 우리 벌써 친구로 지낸지 10년이나 지났어. 참 긴 시간이지. 그런 긴 시간을 너와 함께해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너가 엄청 편해졌어.


가족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고민을 털어보기도 하고, 내 유치하고도 이상한 비밀들을 너에게 알려주기도 하고, 너가 생각해도 그때 난 정말 이상했지?


그리고 너가 나랑 어깨동무나 팔짱 같은 가벼운 스킨쉽을 할때는 솔직히,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했어. 너랑 가까이 있으니 네 향이 더 잘 나더라.


그 향이 날 편안하게 했고, 너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날 행복하게 만들었어.


그런데 다른 여자애가 나한테 그럴때, 너에게서 느꼈던 그런 감정들이 아닌 불편하고 얼른 빼고 싶은 생각만 들었어.


그날 부터였을까? 아니면 그 전부터였을까, 혹은 그 후일 수도 있지.


어느날 부터 네 앞에만 오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평범하게 공부를 하고 있다가도 네 생각이 갑자기 났어.


그땐 그게 그냥 심심해서였는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사랑이더라.


너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준걸 알아. 어제만 해도 내가 너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 아니 흉터를 줬을지도 몰라.


그래서 집에 들어오고 나서 너무 후회스러웠고, 너에게 그런 날카로운 말을 내뱉은 내가 너무 원망스러웠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몰랐고, 그냥 난 구제불능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지.


그렇게 그냥 너와의 사이도 끝난거라고 생각했을 때, 의외로 아빠가 그때 도움을 줬어.


머릿속에 든 생각들을 말하려 했는데, 입 밖으로는 엉뚱한 말이 나오는, 그런게 있잖아.


아빠도 그런 비슷한게 있었대. 부전자전이네, 그치?


아빠는 말을 할때만 솔직하지 못하는거니까, 글로 써보라고 했어.


그래서 이렇게, 너에게 편지를 썼어.


너가 이 편지를 안 읽을 수도 있겠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어제 내가 그런 한심한 말을 뱉었으니까.


그래도 그런걸 참고 이 편지를 읽으면, 알아줬음 좋겠어.


사실 난 네가 전혀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널 좋아해서 그렇게 고장난 것처럼 행동했다는걸.


너에게 했던 모든 모진 말들은 사실 다 널 좋아한다는 의미라는걸.


내가 널 생각보다 훨씬 많이, 더 많이,


좋아한다는걸.


좋아해, 그리고, 사랑해.


너가 이 말을 안 믿을 수 있겠지만, 이 말만은 정말 거짓 하나 없는 내가 하는 가장 순수하고, 순도 높은 말이야.


그럼, 학교에서 만나자, 안녕.]


“…..”


차가운 냉기가 가득찬 내 볼에 따듯한 눈물이 흘렀다. 진짜.. 김지한 진짜 싫어.. 말도 못하고.. 그래도.. 그래도…

나는 달려갔다. 어디로? 김지한의 반으로! 김지한의 반 문을 세게 열어 안으로 성큼 들어와 눈물 콧물 가득한 얼굴을 김지한의 교복에 대고 닦는 것 마냥 비비면서 훌쩍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바보 아니야? 어떤 낭만 없는 사람이 고백을 편지로 해! 진짜 낭만도 없구.. 감성도 없는 감자 같아!”


그 말을 끝내고 김지한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득 잡은 채 울먹이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확! 뽀뽀했다!



-17년뒤-


“여보! 일로와봐!”


나는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내 말에 방금 자다 깬 듯한 남편이 비몽사몽한 채로 내게 걸어왔다.


“왜애..”


나는 내 작업실 벽에 걸린 거대한 그림을 보여줬다. 남편은 그 그림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그런 남편의 반응에 나는 쿡쿡 웃음이 났다. 남편의 반응이 귀여워 남편의 옆에 서서 머리를 어깨에 기댄 채 같이 그림을 바라보았다.


“여보랑 나랑, 사랑이야, 어때? 잘 그렸어 나?“


남편은 아까와는 달리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더니 날 안아들며 이마를 맞대고 말했다.


“너무 잘 그렸는데 우리 여보? 역시 미술과야! 사랑이도 분명 엄청 좋아할걸?”


나는 남편을 보면서 웃었다. 그리고 조금 튀어나온 배를 한 손으로 매만졌다. 남편도 그 모습을 흐뭇하게 웃으면서 바라봤다. 남편의 품에 안긴 채 계속 사랑이에 대해 얘기하며 배를 만지다가, 태동이 느껴져 남편에게 말했지만, 언제나 남편이 귀를 댔을 땐, 늦은 뒤였다. 남편이 이번에도 아쉬워하자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하하 웃었다. 남편도 내 웃음을 보며 웃었다. 정말, 소꿉친구와 결혼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는데, 이렇게 내가 결혼하다니, 신기하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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