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되지 않을 권리

온이 완벽해야 오프가 완벽해진다.

by 코와

5시 55분


퇴근 후나 주말에 상사에게서 걸려 오는 전화,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히고 싫은 것이 직장인의 당연한 마음입니다.사실 한국 사람들은 일이 끝나도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유별난 민족입니다. 전 세계 어딜 가도, 9시 출근 6시 퇴근(9 to 6)이 원칙인 회사에서 5시 55분에 상사가 "내일까지 이거 이거 좀 처리해 줘"라고 지시하면 반응은 한결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하고 컴퓨터를 끈 뒤, 다음 날 아침 9시에 출근해서 그 일을 시작하죠.

그런데 유독 한국인들만 다릅니다. 속으로는 "아씨, 퇴근하려는데 왜 저래" 하고 온갖 불만을 쏟아내면서도, 기어이 저녁을 먹고 다시 자리에 앉아 그 일을 밤새워 끝내놓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지독한 책임감과 연결성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라는 눈부신 성공을 만들어낸 원동력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명함에 새겨진 ‘연결될 의무’

하지만 시대가 변했습니다. 이제는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Work-Life Balance)¹'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가 되었고, 퇴근 후에는 업무와 완전히 단절될 수 있는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법으로 보장하자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을 봅시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만 봐도 직장 문화가 우리와 사뭇 다릅니다. 일본 직장인들의 명함을 받아보면 회사 유선 전화번호나 팩스 번호만 적혀 있을 뿐, 개인 휴대폰 번호는 아예 적어두지 않는 경우가 태반입니다.² 퇴근 후에는 사적인 연락처를 공유하지 않으니 당연히 완벽하게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누립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명함을 한번 보십시오. 이름, 직책과 함께 가장 크고 굵은 글씨로 적혀 있는 것이 바로 '개인 휴대폰 번호'입니다. 애초에 24시간 연결되어 있음을 전제로 일하는 사회인 것입니다.


주차된 렌터카를 훔쳐 타는 주인

물론 퇴근 후에는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용기를 내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다해야 할 '의무'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회사와 근로 계약을 맺고 내 하루의 시간(9시부터 6시까지)을 회사의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그 업무 시간 동안, 개인 휴대폰으로 가족이나 지인과 시시콜콜한 문자를 주고받지도 않고, 수시로 자리를 비우며 담배를 피우러 가지도 않고 오롯이 일에만 몰입하고 있습니까?

내가 주말에 여행을 가려고 렌터카를 제값 주고 24시간 빌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차를 몰고 목적지에 도착해 잠시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쉬고 있는데, 렌터카 회사 사장이 몰래 찾아와 보조키로 문을 열고 내 차를 끌고 나가 개인적인 볼일을 보고 돌아온다면 어떨까요? "어차피 지금 운전 안 하고 주차만 해둔 거니까 잠깐 쓴 건데 무슨 상관이냐"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온다면 분통이 터질 일입니다. 내가 차를 당장 운전하든 주차장에 가만히 세워두든, 그 24시간 동안 차를 사용할 모든 권리는 정당한 비용을 지불한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명백한 계약 위반이자 상도덕을 저버린 기만행위입니다.

우리의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회사에 팔아버린 근무 시간 중에 사적인 딴짓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렌터카 주인이 몰래 차를 끌고 나가는 얄미운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내가 내 시간을 온전히 회사에 맡겼다면, 그 시간은 더 이상 내 마음대로 뜯어 쓸 수 있는 '내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시 다른 나라 이야기

그래서 2010년도에 휴대폰이 막 보급 되었을때 휴대폰을 회사에서 충전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한것을 일본 법원은 합법적이라고 한적이 있습니다. 업무적으로 사용을 안하게 해주었는데 왜 충전을 하냐 할정도의 엄격함이죠. 만약 휴대폰이 꼭 필요하다면 회사에서 휴대폰을 지급해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제가 봐도 이건 좀 지나치게 오버 하는 거 같습니다. 그럼 미국은 어떤가요?

미국 직장인들이 초대형 스탠리(Stanley) 텀블러를 봅시다.

최근 '스탠리(Stanley)'라는 브랜드의 초대형 텀블러³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전국적인 품절 대란을 일으켰습니다. 벤티 사이즈를 훌쩍 넘어 무려 1.2리터나 들어가는 무식하게 큰 이 물통을, 미국 직장인들은 왜 그렇게 열광하며 들고 다닐까요? 미국인들의 덩치가 유독 커서 물을 많이 마시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구글이나 애플 캠퍼스처럼 회사가 너무 넓어서 사내 카페까지 가기가 멀기 때문일까요?

그들이 초대형 스탠리 텀블러를 책상 위에 두는 진짜 이유는 단순합니다. 업무 시간 중에 좀처럼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이 시간 동안 온전히 업무에 집중하기로 계약했으니, 물을 뜨러 가거나 커피를 사러 밖으로 나가는 시간조차 아끼겠다는 프로의식의 발로인 셈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십억 원의 연봉을 받는 프로 야구 선수가, 한참 경기가 진행 중인 5회 말에 목이 마르다고 1루 베이스를 비우고 야구장 밖 스타벅스에 커피를 사러 나가는 일이 상상이나 되십니까? 직장인 역시 아마추어가 아닌 돈을 받고 뛰는 프로입니다.


온(On)이 완벽해야 오프(Off)를 요구할 수 있다

결국 세상의 룰을 바꾸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퇴근 후 상사에게 연락받지 않을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고 싶다면, 반대로 회사와 '연결되어 있는 시간'만큼은 철저하고 완벽하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내가 팔아버린 시간이라는 렌터카를 살짝살짝 다시 가져다 타는 짓을 멈춰야 합니다. 그게 안된다고 생각한다면 한국적 사고에서 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경험을 했습니다. 최저임금이 올라가니 일자리에 키오스크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찾다가 아예 첫 연결조차 안될수 있습니다.

권리와 의무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내 권리만 핏대 높여 주장하기 전에, 혹시 근무 시간 동안 느슨한 태도로 나를 고용한 회사의 정당한 권리를 몰래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접속(On)된 시간 동안 프로답게 나를 불태운 사람만이, 단절(Off)의 시간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온전한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주석
1. 스탠리(Stanley) 퀜처 텀블러 : 최근 미국 MZ세대와 직장인들 사이에서 물이나 얼음을 대용량으로 담아두고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며 마시는 용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품절 사태를 빚은 1.18L(40oz) 용량의 보온·보랭 텀블러.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