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호흡:붉은 꽃이 피면,나는 여기에 있음을 안다

그늘의 어머니, 포인시아나

by 숨나

​브리즈번의 여름은

달력보다 나무가 먼저 알려준다.


어느 날 갑자기 길가의 포인시아나가

붉게 타오르기 시작하면,

아, 또 이 계절이 왔구나 싶다.

피할 수도, 미룰 수도 없는 그 치열한 계절.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포인시아나는

그저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사진 찍기 좋은 나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화려한 색채.


그런데 몇 해를 더 보내며

이 붉음은

내 생활의 리듬이 되었다.




​꽃이 피기 시작하면 공기가 달라진다.

아직 비는 오지 않았는데

벌써 비 냄새가 난다.


아이의 교복은 더 자주 땀에 젖고,

밤새 에어컨 소리가 멈추지 않는 계절.

마음마저 쉽게 지치는 한낮,

나는 이 나무를 본다.


이상하게도

포인시아나는 조급해 보이지 않는다.

이 더위와 습기 속에서도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는 얼굴이다.




​누군가 말해주었다.

이 나무가 피면

우기가 멀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원주민들은

자연을 그렇게 읽었다고 한다.

설명하거나 정리하지 않고,

그저 오래 바라보며.


나는 그 방식이 좋다.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그저 같이 숨 쉬는 느낌.




​한낮의 포인시아나 아래에 서면

그늘이 깊다. 생각보다 훨씬.


브리즈번의 여름 햇볕은

정면으로 맞으면 꽤 잔인한데,

이 나무 아래에만 서면

잠시 숨이 돌아온다.


아이들도 그늘의 품을 안다.

가르치지 않아도 본능처럼

그 서늘한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늘은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을 부른다.




​나는 이곳에서

여전히 외국인이고,

이방인이며,

늘 반 박자 느린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포인시아나를 보며

괜한 위로를 받는다.


이 나무 역시

이 땅의 원래 주인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여름의 상징이 되었으니까.




​붉은 꽃이 피면

나는 비로소

내가 아직 여기 있다는 걸 안다.


완전히 익숙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낯설지도 않은 채

그 중간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포인시아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왜 여기 왔는지,

언제 돌아갈 것인지.


그저 제 계절에 피어

묵묵히 그늘을 내어줄 뿐이다.


브리즈번의 여름은

그렇게 시작된다.

나에게는 늘,

이 붉은 나무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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