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고르기 : 도망친 곳에서, 나는 아직 숨을 고른다

나의 양심은 매달 찍히는 송금 내역 뒤에 숨어 있다

by 숨나

말하지 않는 사람의 생각을 굳이 끄집어내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존중일까.

아니면 불편하고 성가신 일에 얽히고 싶지 않다는, 나를 보호하기 위한 비겁한 안전장치일까.


치매를 앓고 있는 아빠를 홀로 돌보는 남동생.

그 아이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상처와 갈등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외면한다. 굳이 캐묻지 않는다.

호주로 도망치듯 떠나온 나는, 한 달에 한 번 생활비를 보태는 것으로 내 양심의 값을 계산한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 치부하며 현실의 치열함을 애써 외면하는 밤이면,

나는 비겁한 죄책감에 몸서리를 친다.

그 죄책감마저 지독한 위선 같아 스스로에게 구역질이 난다.


'아빠가 우리에게 해준 게 뭐가 있나. 이건 자업자득이고 업보다.'


그렇게 날 선 말들로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정작 삶의 고단한 무게는 남동생이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가족들로부터 멀리 달아난 내게 ‘도망친 곳에는 낙원이 없다’는 말은 축복이 아닌 족쇄가 되어 마음을 옥죈다.


어제 작은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동생과 아빠의 불화.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 순간 다시 숨이 막힌다.

우울이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문을 두드린다.

열어주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과 이미 지쳐버린 마음이 폭풍처럼 한꺼번에 쏟아진다.


나는 다시 웅크린다.

천둥소리에 벌벌 떠는 아이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이 도망친 곳에서 겨우겨우 숨을 고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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