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관찰 노트 vol.1, 촌지

퇴색되어 버린 마음에 대하여

1. 아주 불쾌한 기억

교실은 선생님이 들어와도 시끄러웠다. 칠판에는 전 시간에 적어 둔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쓰레기통 주변에는 쓰레기가 널부러져 있었다. 선생님이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조금 늦었다.


선생님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아이는 책상을 지나 교탁 앞에 섰다.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선생님은 아이의 얼굴을 한 번 바라봤다. 그 누구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손이 올라갔고, 짝 하는 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소리는 매우 컸지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숨 죽여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아이의 고개가 약간 돌아갔다.


“다음부터는 정신 차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로 돌아갔다. 왜 맞았는지는 몰랐다. 맞아야 할 이유는 너무 많았다.


수업이 끝났다. 아무도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일은 언급될 만큼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 학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체벌과 촌지가 그러하다. 이미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 중에서 학교에 대한 악감정이 있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교권 추락에 대한 기사에도 왕왕 이런 댓글이 달리고는 한다.


“옛날 선생들이 꿀 빨면서, 깡패처럼 애들 팼어가지고.“

“누릴 거 다 누려 놓고, 이제 와서 교권 추락이라고 징징. 너네가 만든 거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교권 추락에 대한 소식이 들려 살펴보다가 이런 댓글을 보면 마음이 안 좋다.


하지만 학교 교육에 대해 불신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영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학교의 몇몇 부조리는 90년대생으로서 학교를 다닌 나도 경험한 것이 있다.


이번 시간에는 그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러한 부조리가 어디서 기원했는지, 그리고 우리는 왜 그 미친 시대를 침묵했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2. 우리 애 좀 잘 봐주세요

부모의 마음은 다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애가 어디 가서 미움 받지 않았으면, 우리 애가 예쁨 받았으면 하는 소망은 다들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자행되었던 어두운 문화가 있다. 바로 촌지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촌지란 마디 촌, 뜻 지를 쓰는데, 이는 속으로 품고 있는 작은 뜻 또는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이라는 뜻이다. 예전에는 금전을 봉투에 담아 건네거나 전달할 때 봉투 겉면에 적던 고상한 문구였고 단어 자체에는 나쁜 뜻이 없었다. 그저 고마운 마음을 전달할 때 겸양적으로 표현하는 말이었을 뿐이다.


다만, 이 문구가 뇌물 특히 교사에게 뇌물로 돈을 건네는 봉투에 주로 사용되었다. 그 폐단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자 그 이후로 촌지 자체가 뇌물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이러한 촌지는 처음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 이를 논하기 위해선 촌지의 개념을 더욱 자세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촌지를 교사에 대해 학부모가 주는 재물로 규정해보자. 그렇게 생각해보면 촌지의 역사는 서당 교육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김홍도, 서당도

조선 시대의 서당은 지방의 초등 교육을 담당하였다. 교사로 볼 수 있는 훈장은 낙향한 선비거나, 은퇴한 관리 혹은 대대로 지역 교육을 담당한 학식 있는 가문의 사람인 경우도 있었다.


훈장은 그러면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였는가? 훈장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보답으로 지역 사회의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식량과 옷감 등을 보냈다. 이러한 현물은 현대의 건조한 학원비라는 개념보다는 교육을 부탁하는 사례금의 명목이었다. 이는 군사부일체의 나라답게 스승은 당연히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사고관처럼 보인다.


이러한 현물은 모든 집이 균일하게 내는 것은 아니었다.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은 내지 않기도 했으며, 경제 상황에 따라 처지에 맞게 내기도 하였다.


이렇듯 조선 시대의 서당에서 훈장이 받은 것은 교육에 대한 감사함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런 스승에 대한 보은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우리 사회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근대화를 이루면서 서양식 학교와 교사가 서당과 훈장의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원산학사는 1883년에 세워졌다. 그리고 1885년에는 배재학당이 외국인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러한 학교들이 몇몇 개가 생겨난 이후에 현대식 학교가 우후죽순 생겨나게 되고,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문교부(지금의 교육부)의 지침에 따라 교사가 공무원화 되고 나라에서 보수를 받아 학생을 통해 직접적으로 소득을 충당하는 관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교사가 본격적인 직업이 되었고, 수익 구조가 분명해진 사회에서도 조선 사회 그리고 그 이전 사회에서도 이어졌던 스승에 대한 보은 의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금전, 현물 등의 보답이 오갔으며, 이는 스승에 대한 감사함의 표현으로 미풍양속 취급을 받았다.


이러한 문화가 촌지라고 명명되며 이러한 촌지가 멸칭이 된 것은 60-70년대로 추정되며, 우스갯소리로 뇌물 받는 고위 관료도 결국 자식을 학교에 보내면 교사에게 삥 뜯긴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촌지 문화는 점차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노골적으로 요구하거나, 아이들에 대한 차별을 통해서 부모를 압박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부모는 자연히 촌지를 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공교육은 교사에게 평가권이라는 권력을 부여하게 되었다. 지금이야 성적 처리가 투명하게 이루어지지만, 생활기록부의 기재나 내신 성적은 평가권자인 교사의 교육적 판단이 개입되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정 부분은 주관이 개입했었다. 대학 입시 열기가 뜨거운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최근인 2000년대까지도 촌지 문화가 존재했다.


촌지를 스승에 대한 감사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면, 사실상 그 의미는 조선시대 때까지나 유지되었을 것이다.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촌지는 내 아이가 차별 받을까봐, 관습적으로, 입시를 위한 요금. 어쩌면 그것보다 이하일 것이다.


2016년 김영란법이 시행된 이후 점차 사라지고 있던 촌지 문화는 아예 학교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지만, 교사와 학생 혹은 학부모 사이에서는 그 어떤 보답성 현물 및 현금도 주고 받을 수 없다.


김영란법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5만원 이하의 선물은 허용된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담임 교사나 교과 교사는 지도와 평가를 담당하기 때문에 직무상 관련이 있다. 이 경우에는 어떠한 선물도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게오르그 그로스, 사회의 기둥들

혹자는 말한다. 이런 법까지 만들고 세상 참 팍팍하다. 그러나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법을 만들어야 할 만큼 기존이 얼마나 부패한 세상이었는지 되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르치는 스승에게 내어드리는 감사함이 당연한 일이 되었고, 당연함은 스승을 촌지 바라기로 만들며 그 의미를 퇴색시켰다.


그 시절의 학교를 경험한 이들은 당연히 학교와 교사가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진창 속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는 있는 법.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마음 속에 그 선생이 아니라 은사님 한 명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아직은 교육에 힘이 있다고 믿는다.


요즘 뉴스를 보면 학교에 대해 갑갑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떨어지는 교권, 무례한 학부모와 학생, 갈등, 다툼. 자극적인 분노들이 학교에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학교에서 출발하게 될 것이다. 미래 세대원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사회인이 될 준비를 해나갈 것이다.


한 명의 교사로서 전체를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기는 조금 민망하지만 나는 사실 조금 낙관적이다.


아이들을 보라. 애들은 그래도 애들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나름의 순수함과 열정이 있고 설령 나쁜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교사들은 어떠한가? 학생들이 없는 교무실에서 오가는 얘기는 죄다 애들 얘기다. 그 애가 왜 그러는지 걱정하고, 그 애가 얼마나 훌륭한지 칭찬하기에 바쁜 선생님들이 많다.


내가 겪은 학교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건데 이들이 만들 미래는 썩 나쁘지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도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교사가 되길 바라면서 이만 총총 줄이고자 한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