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다는 짧고, 책임은 길다

학폭 가해자의 배제가 아닌 정의 실현을 위해

by Epiphanes

최근 들어 “학폭 기록이 있으면 대학 문턱도 못 밟는다”는 말이 더 이상 과장이 아니라, 제법 현실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예전엔 학교에서 벌어진 일은 졸업과 함께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피해자는 깊은 상처를 안고 사는데, 가해자는 별다른 대가 없이 인생을 잘 사는 듯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누군가가 학폭 이력 때문에 대입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이 들리자, 사람들의 반응이 뜨거운 것도 이해된다. “이제야 벌을 받는다”, “사이다” 같은 말이 쏟아지는 이유는, 오래 쌓인 불균형에 대한 반작용일 것이다.


이 분위기가 더 선명해진 건, 학폭이 ‘학교 안의 문제’가 아니라 ‘졸업 이후의 진로’까지 따라오는 문제로 체감되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르세라핌 전 멤버 김가람의 논란을 하나의 변곡점으로 기억한다. 그녀의 데뷔 직후 학폭 의혹이 불거졌고, 활동 중단과 결국 계약 해지, 팀 탈퇴로 이어졌다. 사실 이 사건은 사실관계를 둘러싼 공방도 있었지만, 대중이 받아들인 메시지는 꽤 단순했다. “학폭은 과거로 묻히지 않는다.” “진로가 흔들릴 수 있다.” 그 메시지가 사회 전체의 감각을 더 빠르게 움직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나 역시 학폭이 “철없던 시절의 실수”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피해자는 그 사건을 ‘끝난 일’로 정리하기 어렵다. 학교라는 공간은 매일 가야 하는 곳이고, 괴롭힘은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기보다 반복과 분위기로 굳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피해가 몸과 마음에 남는 방식도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일상을 바꾸는 불신과 공포가 되기 쉽다.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확실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말은 너무 당연하다.

다만 질문은 그다음이다. 우리는 어떤 방식의 처벌을 원하는가. 그리고 그 처벌은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가. 응징을 목표로 할 수도 있고, 예방을 목표로 할 수도 있고, 피해자 보호를 목표로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목적들이 자주 뒤섞인다. “혼나야 한다”는 마음이 “다시는 못 일어서게 해야 한다”로 미끄러지고, “피해자를 지키자”가 “가해자를 사회에서 치우자”로 바뀐다. 그 순간 논쟁은 쉬워지지만, 해결은 멀어진다.


대학 입학과 학폭을 엮는 논의가 특히 민감한 이유도 여기 있다. 대학은 선발의 기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교육의 기관이다. 우리는 대학을 ‘자격의 증명’처럼 말하지만, 대학이 사회가 인정하는 교육 기관인 것도 사실이다. 그런 문 앞에서 누군가를 막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불이익이 아니라 인생 경로의 강한 차단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이 제도를 지지하는 쪽은 “그 정도 대가는 치러야 한다”고 말하고, 우려하는 쪽은 “교육의 기회를 끊는 방식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둘 다 일리가 있다. 문제는 이 둘 사이를 제대로 잇는 설계가 아직 충분히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내가 특히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사람들이 “가해자 불합격”이라는 결과에만 빠르게 환호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환호는 이해된다. 그러나 그 환호가 커질수록 우리는 자꾸 한 가지를 잊기 쉽다. 처벌은 “박탈의 장면”이 아니라 “책임의 과정”이어야 한다는 사실. 사회가 원하는 건 사실 가해자가 대학에 못 가는 장면이 아니라, 가해자가 다시는 누군가의 삶을 망치지 못하게 되는 변화일 것이다. 하지만 변화는 장면이 아니라 과정이다. 과정은 박수치기 어렵고, 그래서 종종 주목받지 못 한다.


게다가 “학폭 기록 = 대학 입학 좌절”이라는 공식이 강해질수록, 기록은 정의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전략의 표적이 된다. 대가가 커지면 계산기부터 두드리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폭력을 줄이기 위해 이 제도를 지지하겠지만, 또 누군가는 그 제도를 이용해 타인의 길을 꺾으려 들 수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악용은 꼭 ‘완전한 거짓말’만이 아니다. 오히려 더 현실적인 위험은 애매한 갈등이 학폭이라는 이름으로 확정되는 순간이다. 상호 다툼, 관계 파탄, 단발성 충돌 같은 것들이 ‘학폭’이라는 딱지로 정리되어 버리면, 기록은 사건의 맥락을 설명하기보다 결론만 남긴다. 그리고 그 결론이 입시로 연결되는 순간, 그 무게는 매우 커진다.


이 맥락에서 ‘쌍방’이라는 말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얼마 전 스레드에서 본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누군가가 무슬림 학생의 밥에 자꾸 돼지고기를 올려 두는 방식으로 괴롭혔다는 내용이었다. 그 학생은 참다가 어느 날 폭발해서 식판을 던졌고, 결국 “쌍방 학폭 기록”이 남았다는 이야기였다. 이 사례의 사실 여부는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구조 자체는 충분히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다고 본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방식의 괴롭힘이 오래 이어지다가, 참던 사람이 한 번 폭발하는 순간 “눈에 보이는 폭력”만 남는 장면 말이다.


그때 ‘쌍방’이라는 단어는 책임을 공정하게 절반으로 나누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시간의 비대칭을 지워 버릴 때가 많다. 지속적으로 누군가를 괴롭힌 행위와, 그 누적 끝에 나온 폭발을 같은 무게로 적어 버리면, 기록은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리고 입시가 걸려 있을 때 그 구분 실패는 치명적이다. 결과적으로 “참던 사람이 더 손해 본다”는 메시지가 학생 사회에 퍼질 수 있다. 그러면 폭력을 줄이기 위한 제도가 오히려 “상대를 폭발시키는 전략”을 부추기는 이상한 인센티브가 될 수도 있다.


반대로 다른 형태의 불신도 생긴다. 어떤 사람은 기록 하나로 길이 막히는데, 어떤 사람은 논란이 있어도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한다는 불신이다. 고 최진실의 딸 최준희를 둘러싼 학폭 논란은 과거부터 여러 매체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돼 왔고, 그 과정에서 사과나 해명도 보도된 바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핵심은 개인적인 비난이 아니다. 사람들이 이 사건을 소비하는 방식이다. 누군가는 “배경이 안쓰럽다”는 이유로 그녀를 감싸고, 누군가는 “그럼 피해자는 뭐가 되냐”며 더 분노한다. 같은 단어 학폭을 두고도 적용 기준이 흔들리는 순간이 생긴다. 중요한 건 ‘유명인은 벌을 안 받는다’가 아니라 벌이 어떤 사람은 제도적 불이익을 받고, 어떤 사람은 이미지로만 대가를 치른다는 점이다. 즉, 기준이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학폭을 ‘정의’로 다루고 있는가, 아니면 ‘여론 재판’으로 다루고 있는가. 이 질문은 불편하지만 피해서는 안 된다. 어떤 학생은 기록 하나로 대학이 막히고, 어떤 사람은 논란이 남아도 삶의 경로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이 격차가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분노가 제도를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만 쏠리면, 또 다른 불신을 낳을 수 있다. “정의는 돈과 힘과 서사에 따라 달라진다”는 체념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논쟁이 “대입을 막아야 한다 vs 막으면 안 된다”로만 갈라지는 게 아쉽다. 중요한 건 ‘대입 반영’ 자체를 찬반으로만 볼 게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묻는 일이다. 다시 말해 핵심은 처벌의 유무가 아니라 처벌 방식의 설계다.


가장 먼저 필요한 건, 학폭을 한 덩어리로 뭉개지 않는 것이다. 단어 하나로 모든 폭력을 같은 형태로 만들면, 우리는 억울한 사람을 만들거나 교묘한 가해자를 놓치게 된다. 반복성과 지속성, 집단성, 권력관계, 정체성을 겨냥한 괴롭힘 같은 요소는 별도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록은 결론이 아니라 맥락을 담아야 한다. “신고가 있었다”와 “사실이 확정되었다”는 다르다. “쌍방”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누가 무엇을 지속했는지, 누가 먼저 안전을 잃었는지, 누가 어떤 방식으로 상대를 궁지로 몰았는지까지 보지 않으면, 기록은 공정의 장치가 아니라 편의의 장치가 된다. 문제를 빨리 해결해 버리는 건 당장은 편하겠지만 나중에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또 하나는 출구다. 처벌이 영구적인 낙인으로만 남으면, 우리는 사회적으로 “개선”을 말할 근거를 잃는다. 변화가 검증될 수 있는 책임의 경로가 필요하다. 사과와 배상, 재발 방지 교육, 공동체 봉사, 상담과 치료, 피해자 보호 조치 같은 것들이 실제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방식. 이 과정은 가해자를 봐주기 위한 게 아니라, 사회가 안전해지기 위한 장치다. 동시에 피해자에게 “화해하라”는 압박이 되지 않도록, 피해자의 선택권과 안전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대학’이 정말 교육기관이라면, 교육기관도 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처럼 “기록이 있으면 탈락”만 남고 나머지가 비어 있으면, 대학은 교육기관이라기보다 사회적 처벌의 최종 관문이 된다. 우리가 교육을 말하고 싶다면, 조건부 입학이나 일정 기간의 엄격한 프로베이션처럼 “책임의 프로그램”이 함께 따라붙어야 한다. 그래야 대입 반영이 단순한 벌이 아니라 예방과 교정으로 이어진다.


학폭이 대입에 반영되는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한 건 더 짜릿한 사이다가 아니라 더 정교한 기준이다. 기록이 곧 인생을 결정하는 장치가 될수록, 절차와 비례는 더 중요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정의를 말하면서도, ‘기록’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폭력을 사회에 쥐여 주는 셈이 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질문을 남기고 싶다. 우리가 원하는 건 “가해자가 영영 대학에 못 가는 것”일까, 아니면 “그가 다시는 누구의 삶도 망치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사이다의 쾌감은 짧다. 하지만 책임의 길은 길다. 우리의 제도와 마음가짐은 이제 그 긴 과정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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