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 권리, 잊을 권리

일방적인 알림의 그림자

by Epiphanes

며칠 전 스레드에 '살면서 가장 후회했던 일이 무엇이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이런 댓글을 남긴 적이 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카카오톡 PC 버전을 켜니, 메인 화면에 그 친구의 생일 알림이 떠 있었다. 멈칫했다. 그 알림이 너무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생일 알림은 원래 이렇게 뜬다. 매년, 무심하게, 반복적으로. 그런데 이번엔 그 반복이 내 쪽에서만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선명해졌다.


게다가 화면에 뜬 건 그의 본명이 아니었다. 내가 저장해 둔 닉네임이었다. 내가 그를 부를 때 쓰던 말. 공식적이고 중립적인 정보가 아니라, 내 기억의 결을 그대로 가진 단서가 시스템의 알림으로 돌아왔다. 마치 카카오톡이 내 마음을 대신 호출해 주는 것처럼.


나는 얼마 전 SNS상의 차단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차단이 관계를 끝내는 행위라기보다, 관계를 계속 떠올리게 만드는 단서들을 끊는 행위처럼 작동한다고. 기억은 사람을 통째로 보관하지 않고, 사람을 불러내는 단서들을 붙잡는다고. 피드, 스토리, 알림, 댓글 같은 것들이 그 단서라고. 그래서 단서의 공급이 끊기면 감정도 의외로 빨리 힘을 잃는다고 말이다.


그 글을 쓸 때의 나는 한 가지를 놓쳤다는 걸 이제 알게 됐다. 차단은 내가 플러그를 뽑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다. 단서를 끊을 수 있는 주체가 나에게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다. 그런데 누군가가 죽으면, 관계는 끝나는데 단서는 끝나지 않는다. 현실의 문은 닫히지만, 복도는 남는다. 생일이 돌아오고, 추천이 뜨고, ‘추억’이 떠오르고, 이름이 다시 호출된다. 플랫폼은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기능으로만 세계를 설계해 왔고, 그 설계는 죽음 앞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


그래서 애도는 종종 ‘기억’이 아니라 ‘알림’이 된다. 나는 누군가를 떠올리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떠올릴 타이밍을 통보받는다. 그것도 내가 가장 덜 준비된 순간에. 컴퓨터를 켠 첫 화면에서. 업무를 시작하려는 오전에. 아무런 의식도 없이 손을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상태에서.


이런 순간에 ‘잊힐 권리’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오늘 알림을 보면서 다른 권리가 먼저 떠올랐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끝맺음을 돕는 권리. 우리는 기억을 지우고 싶은 게 아닐 때가 많다. 다만 기억이 나를 찌르는 방식만은 덜 잔인했으면 한다. 내가 꺼내고 싶을 때 꺼낼 수 있고, 내려놓고 싶을 때 내려놓을 수 있었으면 한다. 애도가 ‘강제 재생’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서 상상해 본다. 정부와 플랫폼이 협력해, 누군가 사망하면 그의 디지털 흔적에 최소한의 표식을 남기는 방식 말이다. 그가 남긴 댓글의 내용은 그대로 두되 작성자는 ‘비활성 계정’으로 표시되고, 프로필은 추모 페이지로 연결되는 것. 생일 알림이나 ‘친구 추천’ 같은 자동 호출은 기본적으로 멈추는 것. 누군가의 죽음을 세상에 과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뜻밖의 타이밍에 찔리지 않도록 돕는 장치가 있다면 어떨까.


물론 여기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많다. 누가 사망을 확인하고, 누가 신청하며, 오남용은 어떻게 막을지. 국가가 어디까지 민간 플랫폼에 정보를 요구 혹은 제공해도 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죽음을 ‘데이터 상태’로 다루는 것에 대해 어디까지 동의할 수 있는지. 기술은 가능할지 몰라도 합의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처럼 아무 표식도 없이,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기능들이 죽음 이후에도 계속 돌아가게 두는 것이 정말 중립일까.


아마 플랫폼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그냥 알림을 보여줬을 뿐”이라고. 하지만 알림은 그냥 알림이 아니다. 어떤 알림은 끝맺음을 방해하는 단서가 된다. 어떤 알림은 이미 닫힌 문을 두드리게 만든다. 그리고 어떤 알림은 내가 스스로 정리했다고 믿었던 감정을, 다시 현재로 끌어올린다.


카카오톡 메인 화면에 뜬 닉네임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 친구를 잊지 못한 게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끝맺을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했구나. 끝맺음은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세계가 나에게 그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다시 데려오는지와도 연결돼 있구나.


우리는 언젠가, 죽음 이후의 디지털 세계를 더 성숙하게 설계할 수 있을까. 떠난 사람의 흔적을 지우는 것과, 남은 사람의 끝맺음을 돕는 것 사이에서, 더 나은 균형을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 화면에 뜬 그 이름은 정말 누구를 위해 여기에 남아 있는 걸까.


그래도 내가 그를 친구 목록에서 지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생각이 깊어지는 오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