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마비 리즈 Jan 31. 2023

50+ 에는 이렇게 살고 싶다

2.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유롭게

실외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SNS에 외국 여행에서 찍은 사진이 올라오는 것을 보니 코로나19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1월 초 교환학생 가는 작은 아들을 데려다주러 간 공항도 수속 밟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참여하는 모임이 적은 내게 온 알림 문자를 보니 실감하게 된다. 사실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설레기도 하지만 신규 확진자 수가 14,144명인 것을 보면 걱정이 된다. 


 2020년 1월 첫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로 코로나19의 대응을 위해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했다. 2020년 2월 29일부터 2021년 10월 31일까지 1년 8개월이라는 시간이었다. 누군가에겐 힘들고 지루한 시간이면서 고통의 시간이었을지도 몰라도 나는 거리두기가 익숙했기에 가장 자유로이 즐긴 시간이었다. 


 어려서부터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였다. 6살 때까지 우리 가족은 소아마비를 앓고 난 후유증으로 아픈 언니와 함께 살았다. 그때는 어른도 아이도 ‘인권’이라는 말 자체에 대한 개념도 없었을 때였다. 그래서 몸이 불편한 사람에 대해서 부르는 말 자체만으로도 욕설이었고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 언니의 병이 옮는다며 따돌림당했고 친구들에게 문전박대당하는 것도 익숙했다. 

 한 번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포장지도 뜯지 않은 바비 인형을 가지고 나가 친구에게 놀아달라며 내밀었던 적도 있다. 그날은 좋았지만 인형의 유효시간은 하루였기에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다음 날 난 또 친구의 집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 친구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 경험들은 나를 작게 만들었다. 대인관계에서도 위축된 모습으로 나타났고, 친구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친구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해줄 수 있었고 다 해주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또 다른 나와 마주했다. 그래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과 먼 거리를 유지하기 싫었고 조금만 외로워하고 싶었지만 결국, 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함이 최선임을 알았다. 


 내 기도가 통했는지 A라는 친구가 생겼다. 비밀도 공유하고 서로에 대한 진심을 느낄 수 있는 친구였다. 같이 보내는 시간이 짧게만 느껴졌고, 함께하는 시간 동안 많이 웃을 수 있어서 행복하기만 했다. A와 친해지면서 사람을 믿을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친구들과도 편안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언제나 좋을 것만 같았던 A와의 관계였지만, 우리 사이엔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다른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을 통제하고 내 상황이 어떤지 상관없이 모든 것을 같이 하길 요구했다. 혼란스러웠다. 여중, 여고 6년을 같이하면서 내게 중요한 존재가 된 우리였는데. 그렇게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내게서 답을 찾으려고 했고,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렸다.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다른 친구들은 여전히 내 곁에 머물면서 지금도 나를 안아주고 있다. 결국, 난 어느 정도 가까움도 편안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 후 결혼하고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들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난 부모님의 여전히 철부지인 딸이고 시부모님 옆에 살며 여우보다는 곰과에 속하는 며느리다. 

 앞에서 언니 얘기를 했기에 예측할 것이다. 장애 가진 딸에 대한 부모님(사실, 엄마 아빠라는 호칭이 더 익숙하다)의 관심이 얼마나 대단할지. 관심의 대상이 언니에게서 내게로 향하게 된 부모님은 아주 작은 나의 감정변화도 알아차리고 나를 힘들게 했다. 부모가 되어보니 이해는 하는데 그때는 숨통을 쥐는 것 같았다. 그 시간이 지나가고 지금은 철없는 막내딸로 부모님과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중이다. 


 남편과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서로의 결정에 대해서는 신뢰하고 존중하며 살아간다. 때론 서로의 시간에 대해서 자유로움에 대해서 서운함을 느낄 정도로 ‘따로 또 같이’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따로 또 같이’는 따로 있을 때는 서로의 생활에 충실하고 같이 있을 때는 우리에게 충실하게를 의미한다. 가까이가 필요할 때는 가까이, 거리두기가 필요할 때는 조금 떨어져서의 원칙이다. 이 원칙이 지켜져서 우리 부부가 싸우지 않고 25년을 살아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두 아들. 아들만 키워본 엄마들이라면 아마 예상할 것이다. 큰아들보다는 작은아들과 치열한 전쟁을 통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편안한 관계를 맺는 법을 배웠다. 덕분에 이제는 완전한 하나의 개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며 삶을 설계하고 있어서 감사하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치열한 전쟁을 했기에 가능했다는 것!


 시부모님은 부모님만큼 편안하다. 대학원 과정에 있을 때 며느리를 위해 사시던 집을 정리해서 같은 아파트로 이사를 오셨다. 우리 집은 며느리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산 게 아니라 시부모님이 며느리의 편의를 봐주시며 사셨다, 언제나 감사한다. 친정보다 가까운 심리적 거리는 상황에 맞게 그렇게 조절 가능한 것이 아닐까?


 나는 사회복지와 상담을 공부하면서 자신을 이해하는데 시간을 투자했다. 상처투성이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났고, 위축되어 사람들 뒤로 숨는 나도 만났다. 피하지 않고 잘 들여다봤다. 그 시간을 통해 나는 가족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50+ 이후에는 더 그렇게 살고 싶다. 

 물론 지금도 가끔 상처받은 내면 아이가 툭툭 고개를 들긴 하지만 외로움을 즐길 줄 아는 나이 50의 아줌마다. 그렇게 상처받은 내면 아이가 고개를 들지만 관계 속에서 해결할 수 있기에 이젠 두렵지 않다. 나와 상대방이 암묵적으로 협의한 그 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야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때론 우리가 정해둔 거리에 침묵이 흐르는 시간이 찾아올 수 있다. 그 시간조차 즐길 수 있도록 서로를 신뢰하고 있다면 그 침묵은 또 다른 관계의 즐거움을 찾게 해 줄 것이다. 상대방의 눈치를 보며 사실이 아닌 것을 추측하며 불안한 시간을 보내지 않아야 한다. 나도 그랬다. 분위기가 달라지면 혼자 추측하고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 증거를 찾기를 반복했다. 결국 그것은 오해를 불러왔다. 

 물어봐라. 내가 의심하는 것을. 우리는 상대방의 몸가짐이나 얼굴표정을 통해 속마음을 알아내는 관심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내 마음을 지옥으로 이끄는 의심을 버리고 상대방에게 물어봐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계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혼자 즐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 스스로를 치료하고 회복할 수 있는 그 시간이.

매거진의 이전글 50+에는 이렇게 살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