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논거와 이유를 찾고 권리와 의무를 말하지만 가끔은 설명되지 않는 삶의 모습을 보며 숙연해질 때가 있다.
내 의뢰인 중 한 분은, 남편과 안 좋은 일로 이혼했지만 남편이 전처와 낳은 자녀를 본인이 거두어 함께 사는 분이 있다. 친부도 나 몰라라 하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음에도 본인의 아들로 애지중지 여기며 사시는 거다. 그렇다고 형편이 넉넉하냐, 그것도 아니다.
그 모습을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면서도 한켠으로는 이해가 안된다고 혀를 내두렀다.
다행히 그 분의 사건은 잘 처리가 되었고 얼마 전 있었던 조정기일에서 조정위원이 의뢰인에게, "선생님, 복 받을 일 많이 하셨나봐요. 좋은 변호사 만나는 일도 복인데 선생님은 좋은 변호사님 만나셨어요"라고 했다. 의뢰인도 "네 그럼요. 우리 변호사님 너무 고생하셨죠" 라며 날 추켜세웠다.
분명 날 칭찬하는 말이니 우쭐할만한데 우쭐하기 보다 뜨끔했다. 조정위원이 의뢰인의 개인사까지 다 알고 얘기한 건 아니지만 나는 '복 받을 일'이라는게 왠지 아들과의 일 같이 느껴졌고 평소 이해가 안된다고 말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의뢰인은 아들을 키우면서 어떤 셈을 하거나 이유를 대지 않았을 거다. 워낙 순박하신 분이라 '사람의 도리'라든지 '기른 정' 같은 미사여구를 대지도 않으셨다. "어떻게 그래요?" 라고 묻는 내 질문에 그냥 웃었다.
어제 저녁, 퇴근한 남편은 본인의 의뢰인의 이야기를 했다. 암 투병을 하고 계신 의뢰인인데 작년만 해도 낯빛이 좋지 않았던 분이 최근에 취업을 했다며 밝은 모습으로 어제 미팅에 오셨다는 거다. 암에 걸려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는 상황에서 자기 같으면 낙담해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상황에서도 취업을 하고, 취업했다고 좋아하는 의뢰인의 모습을 보니 존경스러웠다고 했다.
우리는 잘 재단된 권리와 의무, 말끔한 이유와 근거들로 정돈된 삶을 좋은 삶이라 하지만
이그러지거나 삐뚤어지고, 설명도 이해도 될 수 없는 삶의 가치를 잘 모른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