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철학 수고》를 읽고-1

1844년 파리에서 휘갈긴 원고지, 그리고 분업과 진로에 대하여…….

by 잠자르 모프

“노동자가 기계로 전락했기 때문에, 노동자는 기계에 맞서야 한다.”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로 돌아왔다. 내가 원전을 접한 철학자들 중 이제 고작 두 번째일 뿐이지만, 그를 읽을수록 들려 오는 목소리가 선명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낡음 속에서 200년을 건너 나를 찌르는 날카로움이 있다.


우선 이번 독서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산뜻한 시작과 절망적인 끝맺음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간단한 고전 경제학에서 시작해서 눈으로도 차마 읽지 못하겠는 헤겔 변증법과 철학 일반에 대한 비판까지, 독서 난이도의 편차가 아주 심각했다. 헤겔을 알아야 헤겔을 까는 것도 이해를 할 텐데.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가 키에르케고르 같은 이들을 비판하는 것과 달리, 마르크스가 헤겔을 반박하는 지점은 이해하기 쉽지만은 않았다. 책 내용이나 대강 훑되, 오늘은 제1수고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상단의 저 문장에 집중해 볼 것이다.


내용이 짧지 않으니 2편으로 나누어 올릴 계획이다.




(1) 내용 요약


제1 수고는 스미스 혹은 리카도 같은 국민경제학자들의 저서를 인용하며 그들의 논리에 따라 무산계급이 얼마나 처절하게 사투하고, 또 철저히 파괴당하는지 추적하고 있다. 가령 예시를 들어 보자면, 국민경제학은 고용과 피고용이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계약인 양 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임금 조건에 대한 인식 차이로 계약이 성사되지 않는다 가정할 때 자본가가 노동자보다 버틸 수 있는 기간이 훨씬 길다는 것, 따라서 결국에는 노동자가 한 발 물러 계약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러한 배경에 의해 노동자는 첫 단계부터 자본가와의 역학 다툼에서 패배한 채 요구한 임금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그렇다. 마르크스의 추론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다만 노골적일 정도로 야생적인 묘사까지 오늘날과 닮아 있지는 않다. 그 정도의 극단적 결과는 비교적 일어나지 않으니 역시 옛날이기는 하구나 싶은 부분이다.


기술이 발달하고 인구가 늘어나면 노동력 공급이 증가하고, 이조차도 자본가가 구매하는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값, 즉 노동임금이 감소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말이 아니다. 남는 상품 재고는 창고에서 자본가의 마음을 썩힐 따름이지만 이 남는 노동력의 재고는 하루아침에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하게 한다. 이리하여 자본가가 얻어낸 이윤은 다시금 이윤 극대화를 위한 기술 개발의 자본으로 투입될 테고, 결국에는 이 반복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자본가라고 다 같은 자본가가 아니다. 이들은 영세자본가와 대자본가로 나뉜다. 이 경우 종국에는 항상 대자본가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 대자본은 손해를 버티기 쉽고 더 적극적인 할인으로 고객을 더 많이 유치할 수 있으며, 결정적으로 단위 생산량 당 들어가는 자본이 훨씬 적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영세자본가는 경쟁에서 패배해 무산계급으로 전락한다. 한마디 덧붙여 보겠다. 나조차 동네서점보다 포인트 적립, 쿠폰 할인 등을 제공해 주는 교보문고가 끌리는데, 남들이라고 안 그럴까?


노동은 가치 창출의 원천이다. 간단히 보아도 공장이 노동 활동 없이는 생산물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참고로 이 노동가치설은 마르크스가 최초로 주창한 게 아니고 국민경제학자들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기존에는 마르크스가 고안해낸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그리 생각했는데, 크나큰 착각이었다.


지대는 왜 받는가? 생산의 토대인 토지를 임대해 주었기 때문에 수익의 일부를 받는 것이다. 그는 상품이 생산되어 판매되기까지 그 최초의 토대를 마련해 준 것밖에는 일말의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않았다. 시장에 ‘α’를 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수익을 얻는다. 마르크스와 더불어, 심지어 스미스 같은 국민경제학자들까지 지주와 그가 받는 지대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건 이러한 까닭에서다. 게다가 지대는 다른 데서도 영향을 받는데 이는 토지 자체의 가치보다 그 인근의 인프라에 영향을 받는다. 아무리 비옥하더라도 인근에 도로 하나 없는 곳보다 척박할지언정 항구와 철도 옆에 위치한 땅이라면 더 많은 지대를 거둘 수 있다. 그리고 임차농이 수익을 위해 투자한 자본은 임대 계약이 끝날 때 더 높은 지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로 역전된다. 노동 안 들이고 수익을 올리며 돈 한 푼 안 들이고 계약에 있어 언성을 높인다.


내가 이 부분을 읽으며 크게 놀란 부분은 마르크스의 개탄은 철저히 국민경제학 내부 논리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흔히 스미스의 《국부론》은 자유시장경제를 추종하는 세력이 성서처럼 취급하는 서적이나, 마르크스가 인용하는 그 내용을 살펴보면 자본주의의 민낯을 가감 없이 기록하고 있다. 마르크스만큼 차갑고, 마르크스보다 끔찍한 모습을 그린다. 이런 부분은 싹 무시한 채 추종자들은 ‘보이지 않는 손’만을 뚝 떼어와 자본주의를 변호하는 무적의 논리로 이용하고는 한다. 마치 실제와 달리 박제된 예수와 중세 교회를 보는 듯한 그림이다. 보이지 않는 손 운운하는 이 중에 애덤 스미스가 우려했던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모습을 모르는 사람은, 알고도 무시하면서 권위에 의존하는 이거나 원전을 읽어 본 적조차 없는 이일 것이다. 물론 나조차 마르크스가 인용한 부분으로만 스미스를 접했으므로 감안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 책은 이제 그 유명한 ‘소외된 노동’을 다루는 파트로 넘어간다. 이 부분이 제1 수고의 마지막이기도 하다. 우선 여기서 짚고 넘어가자면 나는 아직 소외의 정확한 원리를 깨우치지 못했다. 그저 마르크스가 “이것이 소외의 일종이오.”라고 짚는 부분만 파편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의 힘을 빌어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다. 소외는 ‘내가 만든 것이 내 머리 위에 군림하는 상태’이다. 그리고 노동 그 자체로부터의 소외,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타인으로부터의 소외,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로 나뉜다. 제각기 설명해 보자.


첫째로 노동 활동으로부터의 소외는, 노동이 자유로운 자아실현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강제로 수행해야만 하는 연명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는 노동자가 상품을 생산할수록 자본가의 재산이 되어─물신성 등의 요소로─노동자를 옥죄는 것. 타인으로부터의 소외는 이러한 과정들로 말미암아 인간 본연의 사회적, 협력적 성향을 잃고, 상대를 경쟁자로 여기게 됨을, 인격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화폐와 이익의 렌즈를 거쳐야만 인식함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는 인간다운 창조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동물적 생존 본능에 매몰되는 상태를 뜻한다. 바로 기계적인 반복 노동의 삶.


이것들을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제1수고는 여기서 끝난다.




(2) 분업과 진로에 관한 고찰


앞서 이야기할 것이 있다. 후술하는 인간은 어디까지나 경향성에 관한 논의이지, 개인의 차원에서는 얼마나 빗나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 주길 바란다.


“노동자가 기계로 전락했기 때문에, 노동자는 기계에 맞서야 한다.” 인간이 기계의 영역에서 놀기 때문에, 그런 인간은 기계에 의해 쫓겨날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침팬지의 능률이 인간보다 낫다면, 고민할 이유가 없다. 다만 이번 경우에는 침팬지조차 아니다. 실을 뽑는 면직공을 실직시키고, 허리 숙여 밭을 가는 농부 10명을 1명으로 줄이고, 공장 노동자를 길거리로 내모는 기계공의 작품은 일면에 지나지 않았다. 사무직을 대체하는 지성의 기계는 메카닉의 영역이 아니었다. 쥐는 제 손으로 쥐덫을 만드는 법이 없는데, 손수 코드를 짜 버린 개발자들은 이제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제 죽음이오, 노동력의 파괴자가 되었노라.


노동자를 기계로 만든 요인이 무엇인가? 분업이다. 공장에서 이루어지는,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든 바늘 공장 예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과연 그런 것만이 분업일까. 아니, 나는 세상 모든 직업을 분업의 일종이라 부르겠다. 단지 한 상품을 분담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온전히 상품을 생산하더라도 그것은 사회적 분업의 일종인 것이다.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모든 상품. 이런 의미에서 보면 사회의 구조가 색다르게 보인다. 즉 한 상품을 위한 부품이 아니라 한 사회의 부품이었던 것이 드러나게 된다.


기업은, 즉 자본주의의 현존은 전문 인력을 요구한다. 각 분야에서 즉시 동작할 수 있는 톱니바퀴를 원한다.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상품의 종류는 하나로 국한되지 않기에, 이는 곧장 분업이라는 결과를 불러온다. 이 가운데 사회적으로 선망받거나 기피되는 직업—분업의 종점—이 모두 존재하는데, 지금까지는 이 자리가 모두 채워져 왔다. 고소득 직종은 으레 복잡 노동으로 이뤄져 있기 마련이고 이 때문에 해당 직종의 수요를 실질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노동자는 수가 적다. 결국 해당 직종을 얻지 못한 이들은 점차 저임금 일자리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 이 과정에 있어서 자본주의는 절대 자신이 신선한 고기를 원한다고 밝히지 않는다. 사회적 인정을 추구하는 인간 본능에 걸맞게, 고소득 직종을 찬미하는 풍조가 인간 스스로 덫에 걸리도록 만든다.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맹목적으로 달린다.


분업은 우리에게 정형화된 반복 노동을 강요한다. 공장제 분업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자신의 노동도 결국에는 특정한 형태로 발현되는 노동의 반복이다. 버스 기사가 날마다 신호등에 걸리는 시간이 달라지고 교사가 수업 내용을 매일 달리하더라도 그 노동의 본질은 같다. 허나 그 본질이 새로이 나타는 경우가 있는데,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상품의 다양성이 증가할수록, 더 세분화될수록 분업도 따라서 증가하는 게 그것이다. 이는 개인의 차원에서 전문성의 증가와 지식 폭의 감소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가령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철학 체계 전반은 물론이거니와 음악과 수학에도 공헌한 데 반해 오늘날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들은 보편적 인간이었고 우리는 파편적 인간이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설령 분업으로 인해 특화된 인재로 자랐다 하더라도 수요가 존재하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설령 타 분야의 문외한이 되어도 자신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상품 생산을 맡을 수만 있다면 이 정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을 그 누구도 선뜻 해 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 문제다. 특화가 곧 직장이라는 공식은 흔들리고 있다. 그 원인은 근래 여느 이슈가 그렇듯 AI에 있다.


한국은행이 낸 ‘AI 확산과 청년고용 위축: 연공편향 기술변화를 중심으로’를 보면, Chat GPT 출시 이후 3년 동안 청년층 일자리가 21.1만 개가 감소했으며 그중 98.6%, 20.8만이 AI 고노출 업종이었다. 더 충격적인 점은 동시에 50대 일자리는 20.9만 개가 증가했으며 그중 69.9%, 14.6만 개가 같은 고노출 업종에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AI가 주니어의 말단 업무를 도맡고 시니어가 통합해 관리하는 형식이 태어났다. 컴퓨팅 및 시스템 관리업에서는 11%, 법무, 회계, 컨설팅 등에서는 9%, 출판업은 20%, 정보 서비스업은 24%가 대체당했다. 고소득 직종을 향해 대학을 졸업한 이들은 이제 ‘쉬었음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런 세태에 아직도 나는 학교에서 암기식 공부를 하며, 자아실현과 돈 벌 직장이라는 두 가지 이름을 가진 진로를 맞닥뜨리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내가 깨닫는 불합리함을, 2화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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