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책 내용은 몰라도 첫 문장만큼은 모르는 게 더 힘든 바로 그 책이다. 나조차 그랬으니까. 이 책을 처음 접한 건 2025년 10월 후반 즈음 되겠다. 오아시스가 다녀갔던 날이었으니 아마도 26일. 정말 좋아하는 밴드였는데 수학여행과 투어가 겹친 관계로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까닭에 날짜가 더욱 기억에 남은 듯하다.
여하튼 나는 영풍문고 코엑스몰에서 이 책을 구했다. 자화상 출판사의 미니북 시리즈로 위대한 개츠비와 더불어서, 이것 외에도 라인업이 많았는데, 탈무드─유대교 경전을 제목만 보고 혹해 살 뻔했다.─와 위대한 개츠비를 저울질하는 와중에도 이방인만큼은 내내 손에 쥐고 있었다. 무슨 동기였을까? 역시나 이 첫 문장 말고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내용이라고는 하나도 모르고, 작가인 알베르 카뮈에 대해서도 이름조차 모르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줄거리는 다들 알 것이다. 무덤덤하고, 어떻게 보면 건성이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태도로 치른 어머니의 장례식, 마리와의 해수욕, 해변에서의 살인과 괴상한 법정과 희미해져 가는 뱃고동 소리 속에서 마침내 깨달은 세상의 정다운 무관심까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이 작품에 빠져 버린 지점은 바로 여기였다. 도통 무슨 행동들로 가득 차 있는지 모르겠는 1부의 끝자락에서, 방아쇠와 함께 울리는 총성 한 번, 뒤따르는 네 번. 세계 외부에 위치한 독자가 보기에는 사건 처리가 엉성하기 짝이 없는 재판. 그리고 마지막. 자세한 건 후술하겠다.
카뮈의 짧고도 탁 끊어치는 문장은 내게 딱 맞아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했다. 분명 어린 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어 온 편이라고 자신하는 데도 불구하고, 만연체나 쉼표로 절을 덕지덕지 붙인 문장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도통 들지 않는다. 중학생 말기 이후 고등학교 1학년 동안 나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오랜만에 소설을 다시 읽게 되었을 때 골랐던 ‘데미안’이 내게 심히 불편한 기억을 심어 준 적이 있다. 만연체가 고역이었다. 이방인에 대한 글이니 데미안에 관한 말은 이쯤에서 줄이도록 하겠다.
그래서, 문장이 뫼르소의 단순함을 표현하는 장치로서 기능하는 것이겠지만 독자 입장에서도 좋지 않았나 싶을 따름인 것이다. 그외의 문장 미시적 특징은 딱히 기억에 남는 게 없다. 감각적이라는 것은 문체지, 문장의 구조적 특성이라고 보기에는 무리니까 제외한다면 말이다. ‘노인과 바다’─이 또한 하드보일드 백색 문체로 유명한 헤밍웨이의 작품이니.─를 접한 것도 중학생 때의 일이었는데, 두 작품으로부터 내가 받은 인상은 꽤나 상이하다. 당시에는 지루하다고 하드보일드를 싫어했는데 지금은 아니라니.
문장에 대한 건 이쯤이면 충분하다. 내 친구마저 플롯이 괴랄한 삼류 소설이라고 평가 절하한 이 작품이 나를 사로잡은 지점은 단연코 마지막 장면이다.
“그때 이유는 모르지만 내 안에서 뭔가 폭발해 버렸다. 나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기도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의 사제복을 움켜잡았다. 기쁨과 화가 뒤섞여 날뛰는 마음을 그에게 송두리째 쏟아부었다. 당신은 꽤나 자신만만한 태도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당신의 신념이란 건 죄다 여자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당신은 마치 죽은 사람 같은데 살아 있다는 확신은 어디서 나오는가. 내가 빈손처럼 보일 테지만 내게는 확신이라는 게 있다. 나 자신에 대해, 세상 모두에 대한 확신이 있다. 당신보다 더한 확신. 내 삶과 곧 닥칠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다.”
“이 사형수야, 네가 뭘 안다고!”
이 말이 뫼르소가 아니라 작가 알베르의 목소리로 들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카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고등학생 시절에, 즉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와 동갑이었던 적에 폐결핵에 걸렸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다. 죽음에 이르는 불치병인 결핵이 한 소년을 스스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진단 후 일주일 뒤 죽어도 유별난 일이 아니었을 텐데, 세월은 흘러 카뮈가 십 년을 더 버텨 이방인을 쓰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사제의 먼 훗날, 내세 운운에 폭발해 버리는 장면, 이에 대해 굳이 설명해야 할까? 이방인의 해설에서 이 부분을 누락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내가 집중하고 싶은 것은 짧고도 강렬한 두 번째 문장이다. 사형수라니, 뫼르소가 뫼르소를 부르는 말일까? 카뮈가 뫼르소의 입을 빌려 자신에게 하는 소리일까? 아니면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일 수도. 모두 맞는 해석이지만 나는 왜인지 카뮈의 혼잣말로 이해하고 싶다. 세상의 부조리함을 명징히 깨닫고 매일의 삶을 감각한다지만, 왕왕 들던 확신의 흔들림이 녹아난 문장 아닐까. 자신을 사형수라고 부르는 한 남자, 알베르 카뮈, 처음에 깨닫지 못했던 이 부분이 카뮈라는 인간에 대해 알게 된 뒤 다시 보자 무척이나 다르게 보인다. 물론,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문학을 너무 심오하게 해석하는 것도 금물이라고 나무랐지만 알 게 뭐람!
많이들 시지프 신화를 이방인의 해설이라고 부르던데, 실은 내가 배경지식 없는 채로 읽었을 때 가장 내 뇌리에 박힌 부분은 뜨거운 해로 인한 우발적 격발 같은 자연의 부조리가 아니라, 뫼르소를 낙인 찍어 가는 사회의 부조리였다. 단적인 예시를 봐 볼까.
“조금의 정적 후에 그가 일어서더니 나를 도와주고 싶다는 둥, 내게 흥미를 느낀다는 둥 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내게 뭔가 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몇 가지 물어 보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곧바로 내가 엄마를 사랑했느냐고 물었다.
‘네, 다른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내가 대답을 하니, 그때까지 착실하게 타이프를 치던 서기가 키를 잘못 눌렀는지 당황해하면서 앞부분부터 다시 쳐야 한다고 말했다.”
서기가 타이핑을 실수한 게 과연 우연에 지나지 않을 따름일까?─카뮈라면 그렇다고 답할지도 모르겠지만─내가 볼 때는 아니다. 예심판사가 그를 못 마땅히 여기고 뫼르소가 뱉는 진술들은 그가 감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부채질한다. 예심판사는 여기서 뫼르소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따위의 말을 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뫼르소의 답은 달랐고 서기는 실수한다. 서기마저 답을 예상하고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재판 장면은 읽었다시피 난장판이다. 배심원들은 공정한 척하면서도 뫼르소의 황당무개한 답변에 재빨리 그를 비난하는 쪽으로 마음 굳히기 일수다. 이런 면모가 현대인과 어찌 다른가? 외려 당시와 달리 법정에 가 재판을 참관하지 않아도 넘쳐나는 가십거리를 소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 현대인인데.
신기하게도 개개인의 도덕성은 분명한 흠결이 있음에도 그 집단은 도덕성의 흠결을 지니지 않는다. 내가 오늘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렸든, 자전거로 길고양이를 쳤는데도 방치했든, 그런 일들이 내가 인터넷에서 악인을 비난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다만 집단 밖으로 튀어나와 개인의 치부를 공유하게 된 그 악인만이 우리의 비난을 맞게 되는 것이지.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숙고하지 않고 사건 초기의 일면만 보고 이렇네 저렇네 평가하는 우리는 과연 작품 속 우스꽝스러운 재판장과 무엇이 다른가? 하나도 다른 것이 없는데!
나는 이런 요소가 흔히 이야기하는 태양 때문에 살인한 말도 안 되는 일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카뮈 말마따나 자연의 부조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사람이 저지르는 황당무개한 짓은 그만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오랑에 사는 장 타루가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