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결에 실려 온 바람

by 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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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결에 실려 온 바람인지 알 길 없으나,

코끝에 닿는 기운만으로도 봄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분홍빛 숨을 잔뜩 머금은 계절이면,

만개한 풍경 속에서 저마다 자신의 계절을 보낸다.


작년도 올해도 벚꽃을 가까이서 바라볼 기회가

없었지만, 달리는 차 안에서 스치듯 바라본

생동감을 마중해 본다.


시속 60km로 달리는 차창 너머,

벚꽃은 형체도 없이 분홍색 선으로 그어진다.

자세히 보지 못해 아쉽다기보다,

그 속도감이 오히려 벚꽃의 본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은 그렇게

스치듯 바라볼 때 가장 찬란한 법이기에.


생각해 보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너무나 빠르게 흘러가 버린다.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는 순간들도

지나고 나면 흐릿하게 흩어져가고,

모두가 무모하게 철없던 시절

평생의 남은 내 모든 밤을 주고 싶었던 사람들도

인연이 다하고 시간이 흐르면

얼굴조차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만개한 꽃은

곧 질 일만 남았다는 선언 같기도 하다.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있을 때보다,

오히려 미련 없이 자신을 비워내며

바닥으로 회귀할 때 비로소

그 진가가 완성된다.


벚꽃이 아름다운 이유도

적정한 때를 알아차리고 물러날 줄 아는,

향기로 남는 이별이기 때문일까.


어쩌면 찰나라는 말은

벚꽃을 위해 태어난 단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벚꽃을 닮고 싶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다.


그렇다고 떨궈낼 것들을

미리부터 골라낼 필요는 없다.

원래 봄바람은 대답이 없기에,

그저 내 안의 묵은 감정들을

헤집어 놓을 뿐이다.


그 흔들림에 몸을 맡기다 보면,

털어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바람이 대신 가르쳐주곤 한다.


벚꽃이 우리에게 남기는 숙제는 명확하다.

내일의 개화를 위해 오늘을 저당 잡히지 않는 것.

피어있는 동안 짧은 인생 속에서 결점에

집착하느라 너무 많이 계절을 낭비하지 않을 것.


자세히 보아야만 볼 수 있는 꽃잎의 진딧물처럼,

나와 다른 이의 실수들을 너무 많이 지적하고

교정하려 하지 않고 적당히 흐린 눈으로

바라보고 지나쳐줄 것.


예쁜 것을 닮은 모든 마음은 아끼지 않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양껏 퍼줄 것.

어차피 사람은 대개 인연의 끝에 서면

못해준 것만 생각날 뿐, 내가 더 많이 주었던 걸

후회하는 일은 드물기에.


잘해줄 수 있을 때 잘해주고

이미 떨궈낸 꽃잎들에는 미련을 가지지 않을 것.


영원을 바라보는 것보다 찰나의 아름다움을

마주하는 일을 배워갈 것.


벚꽃이 피는 계절은

이 모든 숙제들을 남긴 채 다음을 기약한다.

봄바람에 겨울 내내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던

마음의 먼지들을 털어버리고, 창을 열면

밀려드는 새로운 바람에 깊은 들숨을 들이켠다.


지나가는 감정들에 이름을 붙여주며

기꺼이 흘려보낼 때 우리는 비로소 '지금'이라는

계절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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