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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은수 Nov 11. 2018

대통령을 대통령이라 부르는 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없다

신지영, 『언어의 줄다리기』(21세기북스, 2018)를 읽고

“대통령을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없다.” 


『언어의 줄다리기』에서 신지영 고려대 교수는 말한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일상어에 감추어진 수많은 편견들을 구석구석 추적해 폭로함으로써 한국어를 현대 민주주의사회에 걸맞은 언어로 진화시키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 ‘권력의 목 베기’라고 할까, 이 책은 한국어에 깊숙이 새겨진 온갖 병리성을 제거하기 위해 ‘대통령’이라는 용어부터 바꾸자고 주장한다. 왜 그래야 할까.

신지영, 『언어의 줄다리기』(21세기북스, 2018)

언어가 절대로 투명하지 않다는 것, 의식과 가치의 전쟁터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리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주로 누가 잊어버릴까. 남성, 어른, 권력자, 장(長), 비장애인, 순혈인, 기혼자, 자본가 등 이른바 세상의 모든 ‘갑’들이다. 이들은 언어의 바다에서 숨 쉬고 헤엄치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언어 자체가 주로 이들의 의식을 담은 채 소통되기 때문이다. 


통용되는 언어의 사용에 꺼림칙함과 불편함을 느끼고 편견의 언어를 대체할 새로운 언어를 제안함으로써, 대화를 분쟁의 장으로 만들어 ‘언어의 줄다리기’를 시도하는 것은 주로 여성, 아이, 국민, 직원, 장애인, 혼혈인, 비혼자, 노동자 등이다. “주류 이데올로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첫 번째 출발이 언어 표현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갑’의 의식을 담을 수 있는 것은 소리와 의미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자의적인 동시에 철저히 사회적이어서다. 가령,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을 현재 대통령이라고 부르지만 총통, 주석, 프레지던트(president) 등도 전혀 상관없다. 그 사람을 지칭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를 언어의 자의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언어가 공동체 안에서 쓰일 수 있으려면, 사회적 약속에 따라 소리와 의미가 고정되어야 한다. 소리와 의미를 연결하는 이 과정에서 사회적 힘들이 작용해, 특정 집단의 가치가 언어에 스며든다. ‘언어의 사회성’은 언어 소통의 기반인 동시에 언어가 특정한 관점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정향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대통령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은 ‘크게 거느리고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대통령과 국민을 보는 태도, 즉 “수직적이고 서열적인 의미”가 이 말에는 담겨 있다. 하지만 국민은 더 이상 통치의 대상이 아니다. 민주공화국에서 국민은 주권자인 까닭이다. 대통령은 국민이 잠시 위임한 자리일 뿐 상하관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일본을 거쳐 유입된 영어 president의 번역어인데, 원뜻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단순히 ‘앞에 앉는 사람, 즉 회의의 주재자’라는 뜻으로, 처음에 여러 말들을 고민하다가 위계 없이 중립적인 이 말을 국민 대표의 호칭으로 택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대안은 ‘대표’다. 대통령이라는 권위적, 특권적 호칭을 버리고, 평소에는 ‘대표’로, 대외적으로는 ‘대한민국 대표’로 부르자는 것이다. 동 대표, 회사 대표, 당 대표처럼 널리 쓰이면서도, “나이, 성별, 위계 등이 드러나지 않는” 중립적 호칭이라는 점에서 헌법을 개정할 때 논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하물며 신분제 사회의 잔재인 ‘각하’라는 호칭을 대통령 뒤에 사용하는 것은 난센스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저자는 일상 곳곳에서 언어의 줄다리기를 찾아낸다. ‘쓰레기 분리수거’와 ‘쓰레기 분리 배출’, ‘정상인’과 ‘일반인’, ‘고객’과 ‘소비자’, ‘고가 사치품’과 ‘명품’ 등의 대비를 통해 특정 언어의 사용이 어떤 입장을 반영하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쓰레기 분리수거’는 관의 입장에서 일을 바라보는 것이고, ‘쓰레기 분리 배출’은 시민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상인’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담은 말이고, 일반인은 장애인 입장에 서서 비장애인을 바라보는 말이다. 언론 기사에서 ‘소비자’를 ‘고객’으로, ‘고가 사치품’을 ‘명품’으로 부르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여자’라는 뜻의 ‘미망인’이라는 말이나, ‘여교사’ ‘여검사’ 같은 표현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감추어져 있다. 저자는 자신들이 사회를 주도하면서 입만 벌리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요즘 애들’한테 미루는 ‘요즘 어른들’의 의식도 신랄하게 꼬집는다.


청년실업이라는 말에도 중대한 문제가 있다. 청년은 역사적으로 나이 어린 남성을 가리키는 데 쓰는 말이다. 따라서 청년실업은 젊은 여성의 실업문제를 외면한다. 또 실업은 전 연령의 문제이지 특별히 청년의 문제만은 아니다. 하지만 이 표현이 자주 쓰여 프레임을 형성함에 따라 청년문제를 ‘실업’으로 고착하는 효과를 빚었다. 2000년까지만 해도 청년 뒤에 가장 많이 나온 단어는 운동, 연대, 유권자, 문화였다. 청년은 “유권자로서 ‘연대’와 ‘운동’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주체”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청년은 “‘고용’에 문제가 생겨 ‘취업’을 위한 ‘일자리’, ‘캠프’가 필요하거나 ‘창업’을 통해 ‘실업’을 면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언어가 이처럼 무섭다.


『언어의 줄다리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저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언어 감수성’이다. 언어는 가치중립적이지 않으므로, 특정 표현을 자주 쓰다 보면 부지불식중에 낡은 사회적 편견에 가득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자기 언어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언어를 민감하게 사용할 때, 우리는 자존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타자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더 나은 표현을 찾으려 애쓸 수 있다. ‘언어 감수성’이라는 근육을 길러 자신의 언어를 민주화하고 싶은 모든 이들한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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