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누어의 『역사, 눈앞의 현실』, 김영문 옮김(378, 2018)을 읽다
‘이 사람, 동족이로구나!’
탕누어의 글을 처음 접하자마자 알았다. 우리는 서로를 한 순간에 느낀다. 앎에 대한 열망과 탐구를 그치지 않지만, 우리는 이른바 학자라 불리는 ‘스페셜리스트’와 읽고 쓰는 법이 완연히 다르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읽기’뿐. ‘쓰기’ 역시 읽기의 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머릿속에는 자연과 사회 전체와 이어진 ‘하나의 책’(The Book)이 있고, 우리 가슴속에는 세상 모든 책이 함께 연결된 ‘무한의 도서관’(Infinite Library)이 있다. 새로운 책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 심장은 고동치는데, ‘하나의 책’에 아직 써야 할 페이지가 남았음을 알고 무한의 도서관이 ‘읽기의 도파민’을 온몸에 분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이라는 마약에 포획된 환자들, 그러니까 ‘읽기 중독자들’이다.
스페셜리스트는 하나의 텍스트를 미지의 광석을 대하듯 다룬다. 자르고 쪼고 문지르고 닦아서 어떤 본질이 드러날 때까지 사유의 도가니 안에서 정련한다. 텍스트의 껍데기를 벗기고 심층으로 파고들기 위해 시도와 실패를 무수히 반복한다. 이 수직적 인간에게 필요한 핵심 자질은 진실의 금맥이 발견될 때까지 어둠 속을 더듬고 또 더듬는, 지칠 줄 모르는 건강한 끈기다.
‘읽기 중독자’는 다르다. 우리는 텍스트를 영감을 이어가는 연결의 고리로, 성찰의 꽃을 피우는 접속의 그물코로 사용한다. 하나의 텍스트를 종횡하면서 고금의 온갖 구절을 함께 접붙이고, 과감히 한 문장을 잘라 주저함 없이 뜻을 취하며, 공자와 대화하다 단테를 쳐다보는 호명의 연쇄를 통해 뜻밖의 이해를 도모한다. 절제하는 발랄, 금도를 넘지 않는 균형 감각이야말로 수평적 종단자의 중요한 자질이다.
이 책의 저자인 타이완 문화비평가 탕누어는 어떠한가. 이 지식의 고래는 읽기의 ‘그랑 블루’를 탐험하다가 때때로 사유의 ‘딥 블루’를 수색한다. 그의 글에는 진리가 세계의 어둠으로부터 갑자기 솟구치는 충격적 신선함이 있다. 읽기가 사유를 덧쓰는 이 순간이 바로 ‘읽기 중독자’의 힘을 전적으로 드러낸다. 탕누어의 글에는 넓이와 깊이를 함께 갖춘, 주석적 탐구가 해석의 신선함을 밑받침하는 걸출함이 있다.
탕누어의 이름은 『한자의 탄생』(김영사)에서 처음 접했다. 한국어판 제목과 달리, 이 책은 한자의 기원에 대한 책이 ‘거의’ 아니다.(한자의 기원에 대해 알고 싶다면 차라리 시라카와 시즈카의 『한자, 백 가지 이야기』(황소자리)나 『한자의 기원』(이다미디어)을 읽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 책은 ‘하나의 글자로부터 무한히 뻗어가는 내면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탐구가 있되 문자학의 경계에 갇히지 않는다. 사람이 높은 곳에 올라 눈을 크게 뜨고 아래를 내다보는 ‘바라볼 망(望)’과 만물에 깃든 온갖 혼들이 전하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에게 전하는 ‘성스러울 성(聖)’을 이어서 살핀 후, 탕누어는 덧붙인다.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구상적일수록 더 현실적이고 현실적일수록 더 많은 감정과 사유, 상상이 들어갈 공간이 확보된다. 그리하여 큰 귀를 의미하는 ‘성(聖)’ 자는 위대한 글자, 종교적인 글자가 되었고 큰 눈을 의미하는 ‘망(望)’ 자는 평범한 생활 속에 남아 보통사람들과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시적(詩的)인 글자가 된 것이다.” 고대 중국의 갑골학에서 지구 반대편의 작가 보르헤스로, 읽기의 웜홀을 타고 순간 이동, 그러나 여전히 사유의 힘으로 문장을 팽팽히 당길 줄 아는 재주야말로 이 ‘읽기 중독자’의 웅숭깊음을 보여 준다.
두 번째 읽은 탕누어의 책은 『마르케스의 서재에서』(글항아리)다. 이 책은 ‘구체적 예’를 파종함으로써 ‘전체적 틀’을 추수하는 법을, 동서고금의 책들에 대한 ‘누적된 읽기’로부터 ‘순금의 이론’을 드러내려는 정신의 운동을 보여준다. 죽간, 즉 기록을 세로로 정렬해 묶은 모양이 ‘책(冊)’이고, 붓을 들어 쓰고 가로로 쌓은 듯한 모습이 ‘서(書)’다. 따라서 원초적으로 서적은 ‘수집의 운명’을 타고났다. 서로를 끌어당기고 한데 모여 연결을 이룬다. 공간을 먹어치우며 서재로, 도서관으로, 나아가 세계 전체로 확장된다. ‘읽다’와 ‘수집하다’는 한 몸이다. 읽기 중독자는 필연적으로 수집가가 된다. 이러한 운명을 사유의 제물로 삼아 ‘읽기의 신’을 보려고 했던 사람이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은 “소나 양을 방목하듯” 정성 들여 수집한 책들을 서재 “여기저기에 쌓아두거나 흩뜨려놓는 방식”으로 돌보았다. 책의 ‘수호자’이자 ‘해방자’로서 책을 “‘유용함’이라는 시장질서에서 분리해” “책의 자유를 회복하고 책 자체의 풍부함과 원만함과 온전함을 되돌리려” 했다. 책들의 운명에서 수집가를 발견한 탕누어는 기꺼이 벤야민에게로 나아간다. 벤야민을 디딤돌 삼아 『독서의 역사』를 쓴 알베르토 망구엘로, 망구엘의 글에 나오는 『걸리버 여행기』를 빌미삼아 스티븐 제이 굴드의 분류학으로, 서재를 “깨끗하고 질서 있게 관리하는” 타이완 소설가 주톈윈 이야기로, 벤야민을 닮은 자신의 서재로……. 10쪽가량의 짧은 글에서 탕누어는 세상의 온갖 서재를 빠르게 압축하고 순식간에 펼쳐놓는다. 독자의 머릿속에 저절로 자신만의 서재가 떠오를 때까지 무한히 여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 ‘읽기 중독자’의 사유 방식이다. 세상의 온갖 책들은 건드릴 때마다 사유를 꽃피우는 촉매와 같다. 책은 기계다. 책들에 접속할 때마다 우리는 자지러지면서 ‘촉발’된다. 사유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면, ‘촉발의 연쇄’를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도록 ‘필연적으로’ 또는 ‘그럴듯하게’ 이어붙인 것이다.
『역사, 눈앞의 현실』은 내가 읽은 탕누어의 세 번째 책이다.(한국에 출간된 탕누어의 책은 아쉽게도 이 세 권이 전부다.) 이 책은 탕누어의 독서 기록이다. 탕누어는 무엇을 읽었는가.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었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은 수억 명에 달하고, 진지한 독서 기록을 남긴 사람도 무수하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운영하는 한국고전종합데이터베이스에 ‘춘추좌전’ ‘춘추좌씨전’ ‘좌씨춘추’ 등을 검색하면 1만 건에 이르는 결과가 나온다. 이 책은 우리의 정치이고, 역사이자 문학이며, 또 철학이었다. 이 책이 배양하고 파종한 사상은 우리 사유의 비단에 단단히 얽힌 채로 서로 분리할 수 없도록 짜여 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읽는 것에 다름없다. 중국, 일본, 베트남, 타이완 등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탕누어는 『춘추좌전』에서 자신의 어떠한 모습을 발견했는가. 탕누어가 그린 자화상은 무슨 점에서 특별한가.
『춘추』는 공자가 썼다는 노나라 역사책의 이름이다. 원형은 전하지 않고, 곡량씨(穀梁氏), 공양씨(公羊氏), 좌씨(左氏)가 주석을 붙여 기록해 둔 것이 전한다. 세 가지는 많은 부분 일치하지만 다른 점도 적지 않다. 예부터 가장 중요히 여긴 것은 좌씨가 기록한 춘추, 즉 『춘추좌전』이다. 과거 시험의 필수과목이자 공부의 기초가 되는 다섯 경전 중 하나로 숭앙되었다. ‘전(傳)’은 성인의 저술인 ‘경(經)’에 후대 학자가 붙인 주석을 말한다. 춘추전(春秋傳)이라면 공자가 쓴 『춘추경』의 본문과 함께 주석을 더한 책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좌전(左傳)은 좌씨가 『춘추경』에 주석을 달아서 전했음을 의미한다.
좌씨인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논어』에 나오는 좌구명(左丘明)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탕누어의 말처럼 사실일 가망성은 희박하다. 좌씨는 대대로 사(史)라는 관직을 맡았던 씨족을 일컫는다. 좌사(左史)라고도 했다. 문자가 없을 때 한 나라의 중요한 일을 외워서 전승하는 일을 담당한 문명의 전수자였고, 문자가 생겨난 후 제왕의 곁에서 국가의 일을 문서로 남긴 기록의 책임자였다. 『사기』에서 사마천은 이 일족의 일을 한 줄로 전한다. “좌구(左邱)가 실명한 뒤에 『국어(國語)』를 지었다.” 『국어』는 『춘추좌전』과 비슷한 시기의 역사서다. 희랍 서사시의 위대한 전승자 호메로스와 마찬가지로, 좌구의 실명은 하나의 상징이다. 사(史)는 “중심에서 떨어진 곳”에, 즉 “권력의 이익이 종횡하는 뜨겁고 소란한 장소에서 벗어나” 권력의 손이 닿지 않는 시공간을 살아가는 ‘특수한 존재’라는 것이다. 국가 의례의 집행자인 무(巫)나 축(祝), 그리고 그 후예인 유(儒)가 ‘난쟁이’였다는 전승과 비슷한 상징 효과를 나타낸다.
『춘추』는 본래 노나라 국사(國史)의 이름이다. 좌씨들은 대대로 이 기록을 맡아 임무를 수행했다. 탕누어는 말한다. “국사는 본래 하나의 책이 아니라 일상 업무이며, 군주가 임명한 사관이 끊임없이 기록한 국가의 ‘일기’였다. 이 일기의 ‘나’ 및 저자는 바로 국가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읽는 『춘추』는 좌씨들이 남긴 기록이 아니다. 공자는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새롭게 고쳐 썼다. 이로써 역사의 근본적 성격이, 시작은 있으나 끝은 존재하지 않는 사실의 무한한 집적체가 아니라 ‘자잘한 말 한마디(微言)조차 커다란 의로움(大義)을 실현하는 문명의 완결된 기록체’로 변화했다.
불후의 역사가 사마천은 일찍이 공자의 생각을 꿰뚫어 보았다. “노나라 242년 역사의 옳고 그름(是非)을 가려서 온 세상의 본보기로 삼았다. 천자도 깎아내리고 제후도 물리치고 대부도 성토했다. 이로써 왕도를 이룩하려고 했을 뿐이다.” 왕도란 무엇인가. 문명의 정수, 즉 진리의 비유다.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나 시간의 냉혹한 진전이어서는 안 된다. 뜻이 크고 굳센 선비들이 무거운 임무를 지고 걸어가는 머나먼 도정이어야 한다. “죽은 뒤에나 그만둘” 수 있는, 아니 죽음마저 이길 수 있는 진리의 찬란한 현현이어야 한다. 이는 비참한 현실에 갇힌 위대한 영혼의 탈출기이고, ‘이 문명’(斯文)의 꿈으로 현실의 가혹한 정치(苛政)를 넘어서려 했던 ‘상갓집 개’의 반격이기도 하다. “대국의 영혼과 소국의 육체가 결합한 나라”인 노나라 역사를 고쳐 쓴 『춘추』로써 공자는 예가 군대를 제압하고 말이 힘을 이기는 기적을 보여주려 했다.
『춘추』 이전의 역사가 ‘사실 그대로’를 전하는 술(述)이라면, 『춘추』 이후의 역사는 사실을 고쳐 써서 한 편의 이야기처럼 “처음과 중간과 끝을 갖춘 필연의 전개”를 지어내는 작(作)이 되었다. 문체란 무엇인가. “당사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박한 심정을 담은 것”, 즉 “어쩔 수 없는, 막막한, 가망이 없는,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심정을 담은 것”(사사키 아타루)이다. 문체는 영혼의 움직임을 드러내는 흔적이며, 영성 그 자체이기도 하다. 『춘추』를 통해 공자는 [역사를 고쳐 쓰되] 새로 지어내지 않은 것처럼 진술하는(述而不作) 획기적 문체, 즉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선보였다.
필법은 하나의 엄정한 관점, 즉 글 쓰는 방법이자 사유의 전개 방식이다. 역사는 이제 “누가 보더라도 똑같은 사실을 마구 모아 놓은” ‘사실의 창고’에서 벗어나 인간의 끝없는 선택을 통해서 “이 사람을 기억하고 저 사람을 망각하며 이 일을 강조하고 저 일을 등한시”하는 ‘문화의 일터’가 된다. 요순에서 시작되어 우왕과 탕왕을 거쳐 문왕과 무왕으로 이어지는 문명의 법칙(天命)이 온 세상 끝까지 실현되는 장이요, 안으로 덕을 쌓아 성스러움에 이른 사람이 밖으로 폭력을 순화하고 야만을 교화하는 시간이다. 역사를 사실의 기록으로 버려두지 않고 의로움에 맞추어 일일이 고쳐 씀으로써 공자는 이 아름답고 거대한 이념을 한 치의 타협도 없이 드러내려 했다. 현재에 배반당한 정신을 추슬러 과거를 다시 배열함으로써 미래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 한 것이다.
『춘추좌전』은 어떤 책인가. 탕누어에 따르면, 공자 사후, 그러나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 세대 후쯤에 공자한테 지극한 존경을 품은 사람이 공자의 『춘추』를 암송하고 공부하면서 하나하나 해설을 붙인 기록이다. 그러나 곡량씨나 공양씨와 달리, 좌씨는 공자의 역사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고 살짝 ‘고쳐 쓴다.’ “신성한 분위기를 갖고 있고, 한 글자도 바꿀 수 없으며, 엄연히 저자가 있는 문자 텍스트”인 『춘추』를 이어받아 “한 글자 한 글자 학습하고 이해하고 암송할 책임”을 지는 한편 자신이 “마지막 암송자가 되지 않도록” 후대에 물려주는 무거운 임무를 “대대로 거듭”한 기록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좌전』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좌전』은 『춘추』에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덧붙이고, 『춘추』가 삭제한 사실을 되살려 써내려간 또 다른 역사책이다. 탕누어는 말한다. “『좌전』은 현실을 계속 기록하거나 미래의 방향을 계속 수정한 노나라의 역사 판본이 아니라 완결된 공자의 『춘추』 판본을 새로 읽고, 학습하고, 회상하고, 사색한 책이다. 이 책은 역사서를 쓰는 공자의 기본적인 뜻에다 당시의 상황 변화가 한 겹 더 가미된 저작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탕누어는 『좌전』이 “미래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쓰였다고 말한다. 좌씨는 『춘추』에서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의 무시무시한 귀결을 안다. 또한 공자가 기록할 수 없었던 공자 자신의 역사를 기록함으로써 공자를 역사의 한 부분으로 만든다. 제나라에서 진성자가 임금을 시해했을 때 공자는 노나라 조정에 나아가 제나라를 토벌하자고 주청한다. 이것이 춘추의 커다란 뜻이다. 실력을 따지지 않고 오직 의로움만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어떠한가. 약한 노나라가 강한 제나라를 치는 것은 어불성설. 이 사건은 공자를 ‘철없는 늙은이’이자 ‘반시대적 인물’로 만들었을 뿐, 정의가 실현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이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좌전』은 공자 사후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역사의 근본적 단절을, 공자 또한 기린의 포획이라는 사건에서 예감한 바 있으나 차마 더 이상 적을 수 없었던 ‘참월의 시간’을 표시한다. 작은 나라도 의로움에 의지해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던 춘추의 커다란 뜻은 결국 종말을 피하지 못하고, 하나의 큰 나라를 향해 모든 인간이 속절없이 휘말리는 변곡점이 『춘추』에 나타난다. 이로써 『춘추』와 『좌전』은 같지만 다른 책이 된다. 좌씨가 행한 이 일이야말로 ‘위대한 역사가’의 자질이요, 후대의 사마천이 본받고자 한 바다. 과거가 넘쳐흘러 현재를 침범한 상황에서 끝내 역사의 꽃을 완성하는 행위 말이다.
“『좌전』의 저자는 작은 나라의 국사를 천하의 역사로 만들었다. 노나라 역사 기록물 이름에 불과했던 ‘춘추’라는 명칭도 한 시대를 가리키는 명칭 및 시대분할 방식으로 승격해 242년의 역사가 시간의 큰 강물로부터 독립을 성취하게 했다.” 화살 하나로 토끼 두 마리를 잡는 귀신같은 솜씨다. 『춘추』와 『좌전』의 분리선을 발굴함으로써, 탕누어는 공자를 위대한 과거의 대명사로 높이는 동시에 『좌전』을 최고의 역사서로 승격하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 준다. 왜 탕누어는 『춘추좌전』을 『춘추』로 읽지 않고 『좌전』으로 읽었을까. 이 점이 탕누어의 『춘추좌전』 읽기의 특이성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탕누어의 맨얼굴을, 즉 『좌전』의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볼 것이다. 아마도 이 자화상에 이름을 붙인다면 ‘불우’가 될 것이다.
불우란 무엇인가. 정신과 육체의 메울 수 없는 결렬, 즉 시대와의 불화다. 니힐의 도래, 임박한 파멸을 예감하지만 데카당이 될 수도, 은둔자가 될 수도 없는 이들의 일생을 한마디로 축약한 말이다. 헤겔이 말한 ‘불행한 의식’, 주관과 객관의 불일치로 인해 고통당하는 인간 실존의 얼굴이다. 몸은 아무것도 주도할 수 없는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으나 마음은 문명의 가장 빛나는 얼굴을 보아버린 이들의 마음 상태다. 이는 『춘추』를 쓴 공자 자신의 초상이었고, 아마도 멸망이 코앞에 닥친 노나라를 살아야 했던 좌씨의 현재였으며, 『좌전』이 가장 많은 삽화를 기록하고 있는 정나라 자산의 모습이었고, 치욕 속에서 『사기』를 써야 했던 사마천의 실루엣이었다.
아아, 자산은 얼마나 천재인가. 평생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다. 자산은 얼마나 불쌍한가. 진(晉)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낀 소국에서 태어났기에 단 한 차례 잘못도 용납될 수 없었다. 자산은 말한다. “저는 재능이 없어서 자손대의 일까지 미칠 수 없고, 당대의 일만 구제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을 씹는 자산의 내면에는 얼마나 많은 비가 내렸을까. 공자는 또 어떠한가. 시스템이 갖추어진 큰 나라에는 감히 끼어들 자리가 없었고, 위태한 작은 나라를 기웃대다가 그마저 여의치 않자 마침내 교육과 역사에 몸을 던졌다. 『좌전』을 읽으면서 탕누어는 오나라 계찰, 진나라 숙향, 제나라 안영 등 “가장 훌륭한 자질과 인격을 갖춘 완벽한 인물들”이었지만, 역사의 폭풍우에 떠밀려 자신의 생명을 “운명과 우연에 부침하는 자들”의 손에 맡기는 수치를 견딜 수밖에 없었던 이들과 소리굽쇠처럼 공명한다. 현실의 역사에서는 존재할 수 없고, 글로써만 자신을 빛낼 수 있는 이들이다.
『춘추』의 역사적 실체인 노나라는 어떠한가. 주공의 후예들이 분봉된 나라로, 천자의 예를 행할 수 있는 문화 선진국이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큰 나라와 전쟁이 벌어져 지면 나라가 망하고 이기면 나라가 더 빨리 망하는 작은 나라에 불과할 뿐이었다. 의식과 존재의 심각한 괴리가 노나라의 특수성이다. 주공의 목소리가 사람들 꿈속에서 목소리를 내는 춘추의 시대에는 어찌어찌 버틸 수 있었지만, 이미 공자조차 “주공을 만난 지 오래된” 시대에 돌입하는 등 멸망의 징조가 완연한 시대에는 역사의 운전자가 될 수 없었다. 이런 나라에서는 마음에 천하를 품고 있어도 쓸데없다. 무슨 일을 도모하든지 ‘생사를 염려해야 하는’ 상태에 놓인, 밀란 쿤데라가 ‘소국가 시골티’라고 부른 “변방 소국 사람들의 일상적 처지와 심리”가 절실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야 하지만, 제 힘으로는 전쟁을 막을 길이 부재한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이들은 이런저런 계기로 “[천하의] 큰 문제를 생각하고 대세계의 변화에 관심을 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한 순간 전쟁의 폭풍이 불어오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 탕누어는 중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작은 땅 타이완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가 청년시절까지 타이완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퇴출되면서, 역사의 맨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따지고 보면, “큰 영혼이 작은 육체에 억지로 끼어 있”는 꼴이요, “특이하고도 특이해 황당함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음에 ‘무한의 도서관’이 있어 우주의 비밀을 끝까지 탐험하고, 쿤데라가 깃발을 놓고 보르헤스가 안내를 맡아 『좌전』의 세계를 함께 여행하더라도 차가운 이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분단된 한반도 남쪽의 섬나라 아닌 섬나라에서 태어나 전쟁의 공포를 일상으로 여기고 살아온 우리 역시 무엇이 다르겠는가.
‘위대한 진실’보다 ‘비루한 일상’이 힘이 세다는 데 역사의 잔혹함이 놓여 있다. 마음이 아무리 발버둥치고 애를 써도 소박한 현실을 이길 방법이 없다. 영웅들이 감은 희망의 태엽을 시간은 서서히 풀어 버린다. 찬란한 ‘신념의 빛’도 역사의 밤이 가져오는 거대한 어둠에 묻힌다. 자신의 믿음에 내기를 걸지만, 세상은 마음과 달리 움직여 간다. “물결처럼 계속 반짝이는 인생 현실의 큰 강물”이 한 차례 힘을 쓰면 “멀고 오래된 한 줄기 신성한 빛”은 어느새 사그라진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한없이 곡예를 부리는 탕누어의 풍부하고 중층적인 『좌전』 읽기의 동력은 아마도 이러한 비극적 인식으로부터 연유하는 듯하다. 텍스트 사이를 쾌속하게 여행하는 낭만적 동역학과 실제의 좌표를 끝없이 확인하는 현실적 위상학이 탕누어의 읽기를 이중으로 사로잡고 있다. 역사적 현장의 갈피갈피에서 방황하고 갈등하고 고민하고 좌절하고 묻고 답하는 영혼이 2500년 전 인물들의 행적을 능란하게 파고든다. 역사의 어두운 내면으로부터 탕누어가 발견한 실체는 인간 실존의 적나라한 얼굴이다. 탕누어는 말한다.
“역사를 읽으며 단순하게 기쁨을 얻기는 어렵다. 역사를 진지하게 읽을수록 늘 더 깊은 슬픔과 황량함에 젖기 마련이다. 따라서 인간이 ‘대자연 속에서 가장 공포스럽고 가장 가소로운 종족임’을 믿지 않기 어려우며, 또 인간의 역사를 ‘끊임없이 어리석은 행위를 반복하며’ ‘악몽에서 깨어나려고 몸부림치는’ ‘미치광이의 자서전’으로 간주하지 않기가 어렵다.”
역사의 천사는 어디로 갔는가. 역사는 왜 선함이 아니라 악함으로 물들어 있는가. 그렇다면 『춘추』는 도대체 무엇인가. 공자가 ‘시간의 뱃전’에 새겨 넣으려 했던 문명은 사라졌단 말인가. 사소한 구절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는 거대한 뜻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좋은 답이야말로 탕누어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것이다.
공자가 삶의 나침반으로 삼았던 ‘이 문명’은 현실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이념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공자는 『춘추』를 써서 역사가 아니라 이념을 남기려 했다. 하루하루 닥쳐오는 일상에서 사건들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일은 오직 비천할 뿐이다. 목숨이 걸린 엄중한 일이기에 모든 순간이 다 진실의 빛을 내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생존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 그러나 사소하고 시시한 것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며, 역사의 실체도 아니다. 현실의 잔혹한 결정을 초월하는 형식으로 ‘이 문명’의 운동도 분명히 존재한다.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는 분명히, 결단코, 이 운동이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탕누어는 공자에게서 이것을 읽어낸다. “가장 무섭고 불확정적인 것은 시간, 즉 줄곧 이동하는 시간이다. 눈앞에서 옳은 것이 미래에도 여전히 옳다고 할 수 없다.” 그러니 헤겔을 빌려서 말하자. “문명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요, 현실적인 것이 문명적인 것이다.” 언젠가는 그날이 온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좌전』의 저자는 『춘추』를 읽으면서 일상을 다시 살려 넣었다. 시간 안에 공자의 초상을 그려 넣고, 비정한 현실을 되살렸으며, 『춘추』 자체마저 역사의 한 흔적으로 포섭함으로써 ‘공자라는 꽃’을 피우고 ‘『춘추』라는 열매’를 맺은 역사의 한 단락을 완결했다. 밤이 오는 것을 알아야 황혼이 아름다운 법이다. 하루의 정화가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황홀경에 젖을 수 있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한 것이야말로 공자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좌씨의 훌륭함을 드러내며, 또 탕누어 자신의 영민함을 알려준다. 한 번의 돌팔매로 세 마리 새를 잡은 셈이다. 탕누어, 참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