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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은수 Dec 08. 2018

성편견 만들고 돈에 편향되고…‘몸의 과학’은 오염되었다

김승섭, 『우리 몸이 세계라면』(동아시아, 2018)을 읽다

가장 일하기 좋은 사무실 온도는 얼마일까. 대사율, 피부 두께 등을 고려하면, ‘과학적으로’ 섭씨 21도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한 연구에서 남성과 여성한테 각각 선호 온도를 묻자, 남성은 평균 22도, 여성은 평균 25도라고 답했다. 남성은 ‘과학적 표준’에 가까웠지만, 여성은 그보다 훨씬 높았다. 여성의 느낌이 이상한 것일까. 아니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에서 김승섭 고려대 교수는 ‘과학’ 자체가 ‘차별적’이라고 말한다. 성차별로 가득한 세계가 ‘과학’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과학’이 ‘표준화’한 온도가 1960년대 몸무게 70kg인 40세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측정한 자료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여성 사무직 노동자에게 맞는 실내온도는 평균 23.2~26.1도 사이다. 그렇다면 남녀가 함께 일하는 사무실에서는, 실내온도를 23도에 맞춘 후, 남성은 옷을 얇게, 여성은 두껍게 입으면 좋을 것이다.

김승섭, 『우리 몸이 세계라면』(동아시아, 2018)

이 책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몸은 다양한 관점이 각축하는 전장”임을 보여 준다. 인간의 질병과 몸을 다루는 과학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관점의 영향을 받는다. 질병을 고치려면 돈이나 시간이나 노력 등 제한된 사회 자원을 동원하여 이를 생물학적, 의학적 지식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특정한 몸이 배제되어 공백으로 남는다. 어떤 사회적 주체의 고통은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이 안 되는 등의 이유로 관심이 없어서 측정되지 않는 것이다. 저자는 역사적, 과학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인간을 병들게 하는 가난과 차별”을, “표준화된 몸이 아니어서 아파야 했던 여성의 몸”을 다룬다.


때때로 담배회사 같은 기업은 ‘과학’을 매수하기도 한다. 스트레스 연구의 대가인 한스 셀리에는 1959년 법정에서 흡연이 암 발생의 원인이라고 볼 수 없다는 증언을 하고 1000달러를 대가로 받은 이래, 줄곧 담배회사 자금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그는 1969년 담배가 스트레스 해소 수단으로 도움이 된다고 증언하는 등 평생 암의 원인은 스트레스 등 여러 원인의 복합적 작용의 결과일 뿐 흡연과 관련이 약하다고 주장하는 식으로 흡연의 위험성을 ‘과학적으로’ 면책하는 역할을 한다. 


아직도 암의 원인이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셀리에의 연구를 활용한 담배회사 마케팅의 영향인 듯하다. 미국 국립암연구소는 스트레스가 암을 일으킨다는 가설에 근거가 약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담배에 암을 유발하고, 암을 증진시키는 물질이 있다는 것을 1961년에 이미 담배회사 필립 모리스는 알았다. 셀리에를 매수해 흐릿한 것은 돋보이게 하고, 분명한 것은 감추는 식으로 논점을 왜곡했을 뿐이다. 


‘과학’은 사회적 편견을 생산하고 기업의 이익에 복무하며, 또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에도 동원된다. 일본인 해부학자 구보 다케시는 “조선인의 두골이 작고 골벽이 두꺼운데 뇌 중량이 작은 점에 유의하라”고 말한다. 이를 근거로 그는 조선인이 “지적 방면에 큰 결함이 있음”을 주장하고 “보통교육을 실시”하여 이들을 ‘개량’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조선인은 실제로 일제강점기 동안 실제로 개량되었을까. 저자는 “유전적 요인과 함께 태아기부터 청소년기까지의 영양 상태를 반영하는 유용한 지표”인 키를 기준으로 볼 때,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인의 건강상태에 큰 변화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23~40세 조선인 남성의 경우, 조선말에 태어난 1879~1880년생의 평균키 164.73cm인데, 일제강점 직후 태어난 1911~1915년생의 평균키 역시 164.19cm로 대동소이했다. 일제는 조선인의 삶을 별로 ‘개선’하지 못했던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도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의 경우, 2015년 신생아 전체의 평균 기대수명은 82.45세다. 소득 수준 하위 20%인 이들은 78.55세, 상위 20%는 85.14세로, 소득에 따라 6.59년이나 차이가 난다. 그런데 인간이 평균 1년을 더 살 수 있게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주 어렵다. 35세 흡연자가 평생 금연했을 때 남성은 2.3년, 여성은 2.8년가량, 비만자가 평생 다이어트를 했을 때 남성은 0.7~1.7년, 여성은 0.5~1.1년 기대수명이 늘어날 뿐이니까 말이다. 따라서 한국인의 건강을 좋게 만들려면 금연이나 비만에 관심을 쏟는 것 이상으로 소득, 근무환경, 주거지역 등 사회적 조건이 죽음의 불평등을 낳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부자들에 비해 가난한 이들은 암으로 더 많이 죽으니까 말이다. 


이처럼 ‘과학’은 “시공간을 초월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지식”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구성된 산물”이다. 과학은 성적, 경제적, 인종적, 민족적 편향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 아이 업드려 재우기,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일명 ‘안아키’), 기 치료, 태반 주사 등이 보여 주듯, 개인의 경험이나 신념에 따라 왜곡되기도 한다. 


저자는 ‘과학 또는 전문가의 권위’를 추종하지 말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지식”이 무엇인지를 주체적으로 고민하고 “한국사회의 절박하고 중요한 문제”를 “과학의 언어로 세상에 내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 이어서 이를 위한 두 번째 발걸음을 뗀 저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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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서평입니다. PDF로 받아서 급히 읽고 쓰느라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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