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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은수 Dec 23. 2018

“아직 다 해본 건 아니다.”

마지막 수업,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함께 읽다

학생들과 마지막 수업을 치렀다. 『오이디푸스 왕』, 『메데이아』, 『햄릿』 등 비극을 한 학기 내내 함께 읽었다. 마지막으로 읽은 작품은 『고도를 기다리며』. 금요일 9시 수업을 울면서, 졸면서 따라와 준 학생들이 무척 기특했다. 왜 비극인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청년들한테 반드시 전하고픈 삶의 진실 중 하나다. 삶이 무한히 계속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인간의 정의는 ‘반드시 죽다’이다. 우리는 유한한 시간을, 단 한 번만 살아간다. 무어라도 남기는 것은 있는가. 아니다. 맥베스가 절규하듯이, “인생이란 그림자가 걷는 것”에 불과하며, “소음과 광기가 가득하나 의미는 전혀 없다.”


‘왕이 되리라’는 마녀의 예언을 믿고 온갖 수단으로 권력을 추구했던 맥베스는 왕을 죽여 충성을 잃고, 친구를 암살해 우정을 잃고, 부하를 감시해 신의를 잃고, 끝내 사랑하는 아내마저 잃어버리자 넋이 나간다. 성공이라는 세속적 가치를 죽도록 추구해 봐야 결과는 ‘망연자실’. 청년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삶의 냉혹한 실질이다. 사뮈엘 베케트도 말한다.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는 거지. 해가 잠깐 비추다가 곧 다시 밤이 오는 거요.”


밤, 죽음, 침묵……, 엄중한 무의미가 인간의 실존이다. 해가 비추는 동안, ‘소음’이 아니라 ‘음악’을, ‘광기’가 아니라 ‘춤’을 남기려 무진장 애쓰지만, 날마다 황혼 무렵에는 ‘고도가 오지 않을 것’을 통보받을 뿐이다. 따라서 희망에 중독되는 대신 절망을 긍정하는 것이 정신을 건강하게 한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에스트라공처럼, “더는 못하겠는걸!”이라고 자기 자리를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여기가 인간의 로도스다. 이 부도난 자리에서 우리는 춤출 수밖에 없다. 삶 바깥으로, 죽음 너머로 나가는 방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슬퍼할 필요도, 허무할 까닭도 없다. 조건은 모두 똑같다. 아무도 삶의 결과를 바꿀 수 없지만, ‘살아 있는 동안’을 다르게 지내는 수는 있다. 고도가 오느냐 오지 않느냐에 온 의미를 두는 대신, 고도를 기다리는 이 순간을 어떻게 지내느냐에 내기를 거는 것이다. 블라디미르의 입을 빌려서 베케트는 에스트라공의 절망에 대답한다. “정신 차려, 아직 다 해본 건 아니잖아.”


그렇다. 목숨이 이어지는 한, 우리는 삶의 가능성을 또다시 시험해 볼 수 있다. 서포터스와 인턴으로 열정을 착취당하지 않고도 청춘을 보낼 수 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를 먹느라 배 터지는 대신, 죽고 싶은 현실을 바꾸는 데 시간을 바칠 수 있다. 살아감의 순간순간을 더 자유롭고, 더 숨쉬기 편하고, 더 아름답게 꾸미는 데 헌신할 수 있다.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올해도 ‘고도는 분명히 오지 않을 것이다.’ 일상의 민주화는 더디고, 경제는 여전히 어지럽다. 그러나 패배는 있을 수 없다. 마법의 주문을 한 번 더 외우자. “정신 차려, 아직 다 해본 건 아니잖아.” 이것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마지막 수업으로 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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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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