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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궤도이탈 Apr 26. 2022

23. 고흐의 슬픔

남자는 고흐의 슬픔처럼 앉아있다. 탁자 위에는 반쯤 남은 소주병이 놓여있다.

오늘 늦게 들어와, 여자가 말한다. 어… 남자가 말한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여자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나온다.

나와서도 그 모습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에 대해 생각한다.

남자가 지쳐있다는 것을 여자는 안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그렇기에 지쳐있다는 것을 안다. 이제는 어찌해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렇기에 시간의 파도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너무 늦은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생각하면 이해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이해하면 아파지리라는 것을 알기에.

남자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여자보다 빨리 죽을 것이다. 여자는 차라리 이에 대해 생각하기로 한다.

남자가 죽으면 오늘을 떠올릴 것이라고 여자는 생각. 문득 두려워진다. 때론 사소한 기억이 증오의 댐을 부숴버리니까. 여자는 이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집에 돌아오면 남자는 잠들어 있을 것이고 탁자 위에는 여전히 반쯤 남은 소주병이 놓여있을 것이다. 여자는 투덜거리며 탁자를 치울 것이고 남자가 잠든 방 맞은편 방에서 잠들 것이다.

여자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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