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궤도이탈 May 01. 2022

24. 합정

  나는 병뚜껑을 만지작거렸다.

  야 이게 얼마만이냐. 친구가 맥주를 들이키며 말했다. 그러게. 내가 말했다. 나는 우리가 얼마 만에 본 지 생각했다. 우리가 ‘야 이게 얼마만이냐’라고 할 만한 사이인지 생각했다.

  너가 3반이었지? 친구가 말했다. 아니 5반. 내가 말했다. 아 5반. 친구가 말했다. 나는 친구의 이름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떠오르지 않았다.

  아까 면접 보는데 계속 낯이 익은 거야. 내가 저 사람을 어디서 봤더라? 분명 어디선가 봤는데… 그러다 갑자기 팍 떠오른 거야. 신정고 장우영! 살다 살다 고등학교 동창을 알바 면접에서 다 만나냐. 아 근데 아까 계속 생각하느냐고 제대로 집중 못 했어. 난 떨어질 것 같아. 친구가 말했다. 두 명 뽑는댔나? 내가 말했다. 어 두 명. 친구가 말했다. 두 명. 일곱 명 중에 두 명. 나는 속으로 말했다.

  우리 둘이 됐으면 좋겠다. 친구가 말했다. 그러게. 내가 말했다. 나 진짜 잘할 자신 있는데. 나 다이소 마니안데. 친구가 말했다. 다이소 마니아인 것과 다이소에서 일하는 것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 나는 생각했다.

  요즘 뭐하고 지내? 친구가 말했다. 그냥 지내. 알바 구하면서. 내가 말했다. 같은 질문을 친구에게 하려다 그만뒀다.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나는 병뚜껑을 만지작거렸다.

  너 성용이 알지? 박성용. 친구가 말했다. 모르겠는데. 내가 말했다. 아 너는 모르나? 박성용이라고 우리 동창 있는데 얼마 전에 결혼했거든. 친구가 말했다. 아. 내가 말했다. 잠시 사이. 너 여자친구 있어? 친구가 말했다. 아니. 내가 말했다. 나도 없어. 친구가 말했다. 친구가 맥주를 들이켰다. 나도 따라 들이켰다.

  태윤이 알아? 내가 말했다. 무슨 태윤? 친구가 말했다. 김태윤. 내가 말했다. 김태윤? 모르겠는데. 친구가 말했다. 잠시 사이. 걔는 왜? 친구가 말했다. 죽었거든. 내가 말했다. 아… 친구가 말했다. 백혈병. 스무 살에. 내가 말했다. 안타깝네. 친구가 말했다. 안타깝지. 내가 말했다. 우리는 다시 침묵했다.

  야 너 컴마 기억나냐? 컴퓨터실 마왕. 그 새끼 완전 개또라이였는데. 친구가 말했다. 기억나지. 내가 말했다. 고2 때 그 새끼한테 꼬추털 뜯긴 자리 아직도 털이 안 난다. 다시 생각해도 진짜 미친놈이네. 친구가 말했다. 맞아. 미친놈이었어. 내가 말했다. 그 새끼 지금도 그러려나? 지금 하면 완전 깜방감인데. 친구가 말했다. 지금은 못하겠지. 내가 말했다. 내가 맥주를 들이켰다. 친구도 들이켰다.

  낮에 마시니까 빨리 취하는  같네. 친구가 말했다. 그러게. 내가 말했다. 나는 프레첼을  안에 넣었다. 오독 씹었다. 이름을 물어볼까. 나는 생각했다. 관두자.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침묵했다. 침묵이 조금씩 길어졌다. 나는 병뚜껑의 뾰족한 부분으로 손가락을 찔렀다.

  이 근처 살아? 친구가 말했다. 응 강서구. 내가 말했다. 오 아직 강서 살아? 친구가 말했다. 응. 내가 말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남양주에서 사 년 살다가 홍은동에서 이 년 살고 흑석동에서 사 년 살다가 얼마 전에 강서로 왔어.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강서 사냐고 물어봐서 그냥 응 이라고 했다. ‘아직’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냥 응 이라고 했다.

  나는 건대 살아. 친구가 말했다. 건대에서 여까지 왔어? 내가 말했다. 말하고 나서 후회했다. 응. 동네에 구하는 데가 있어야지. 친구가 말했다. 나는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무어라 말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그래도 2호선 바로라 삼십 분밖에 안 걸려. 친구가 말했다. 생각보다 얼마 안 걸리네. 내가 말했다. 그지? 친구가 말했다. 우리는 침묵했다.

  이제 일어날까? 친구가 말했다. 그럴까? 내가 말했다. 친구가 계산서를 집었다. 내가 낼게. 친구가 말했다. 아냐. 반반 하자. 내가 말했다. 아냐. 얼마 나오지도 않았는데. 친구가 말했다. 그럼 다음에 내가 살게. 내가 말했다. 그래. 친구가 말했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나는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반반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가만히 있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역 쪽으로 걸어갔다. 뭐 타고 가? 친구가 말했다. 버스. 내가 말했다. 나는 지하철.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친구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손을 흔들었다. 친구는 지하철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다 다시 올라왔다. 아 참 번호. 친구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나는 내 번호를 눌렀다. 잠시 뒤 친구의 번호로 전화가 왔다. 이름을 물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 몰라.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가만히 있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자주 연락하자. 친구가 말했다. 응 그러자. 내가 말했다. 그럼 진짜 갈게. 친구가 말했다. 응 잘 가. 내가 말했다. 친구는 손을 흔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나도 지하철 타는데 왜 버스 탄다고 했지. 나는 생각했다. 진짜 버스 탈까. 나는 생각했다.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옆으로 차가 지나갔다. 나는 차 지나가는 소리를 흉내 냈다. 훼에에에에엥. 별로 비슷한 것 같지 않았다. 휘오오오오옥. 이번엔 좀 비슷한 것 같았다. 이런 걸 왜 따라하고 있을까? 나는 생각했다. 조금 취했는지도 몰랐다. 친구의 말처럼 낮에 마시니까 빨리 취하는 것 같았다.

  나는 걷다 말고 난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 멀리 국회의사당과 63 빌딩이 보였다. 해가 하늘 낮은 곳에 떠있었다. 주홍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젊어. 나는 생각했다. 내 앞에는 수많은 날이 남아 있어. 나는 생각했다. 때론 이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 나는 생각했다. 나는 병뚜껑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난간 너머로 던졌다. 바람 때문에 멀리 가지 못하고 추락했다. 이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됐다.

  나는 다시 걸었다. 친구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작가의 이전글 23. 고흐의 슬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