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중한 일요일 2시간을 돌려줘요
어디 게시판 추천이었나, 유튜브 댓글 중에 추천이었나. 넷플릭스의 '파반느'라는 영화의 언급이 눈에 띄었다. 보고 나서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예요. 일요일 오후, 잠드는 시간 전까지 딱 영화 한 편 보기 좋은 시간이 남았다. 여운이 많이 남는다는데 안 볼 이유가 없지. 퍼펙트데이즈 같은 영화면 또 잠 못 잘 텐데 어카냐 이러면서 태블릿을 켰다.
우스꽝스러운 비급 인트로로 잘생겨야만 하는 남주의 서사가 설명된 뒤, 바로 백화점 지하 공간의 주차장과 더 밑의 지하 창고와 지하실만큼 허름한 백화점 근처의 켄터키 맥주집에서 느낌 좋은 잔잔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영화를 한 번에 다 보지 못하고 중간중간에 끊었는데, 일단 젊은 남자주인공이 연기력이 너무 떨어졌다.
상대 배우가 고아성, 변요한이니까 그럴 수 있다 치는데, 그렇게 말하면 유해진, 유지태하고 연기해서 전혀 문제가 없었던 왕과 사는 남자의 박지훈은 어떻게 설명할 거냐. 고아성, 변요한은 대본 고르는 눈이 있어서 좋아하는 배우들인데 많이 아쉬웠다. 뭔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듯 현실과 판타지를 왔다갔다 하는듯한 스토리도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였다. 이건 나중에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래도 일요일 저녁, 직장인의 천금 같은 여가 시간을 투자했으니 매몰비용이 아까워서 영화는 끝까지 다 봤다. 내용 자체는 내가 좋아하는 상처받은 젊은이들의 약한 치유 스토리라 쭉 보기는 했지만, 엔딩까지 30분쯤 남겼을 때 잠깐 멈추기 하고 탄식하며 아내에게 말을 걸었다. 남주가 연기만 좀 더 됐어도 영화가 훨씬 몰입되었는데 열받아 죽겠네. 얘 누구야 도대체? 이렇게 동의를 구하는 요청으로 인터넷으로 검색한 남주 욕을 시작했다.
그런데 원래 나 보는 영화 이런 거에 아무 관심 없는 아내가 어색하게 그럴 수도 있지 왜 그렇게 화를 내냐며 차차 성장하겠지 라며 남주를 두둔했다. 심지어 파반느라는 영화를 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죄없는 애한테 왜 그래욧 하는 아내 말투에 뭐지? 배우가 연기를 못하면 그게 죄 아닌가 하면서 남주 필모를 내리다가 간단히 해답을 찾았다. 내가 욕을 하던 녀석은 아내가 눈에 하트 뿅뿅하며 한참 빠져서 봤던 사극 '은애하는 도적님아'에서 젊은 왕의 연기를 하고 있는 친구였다.
더 이상 남주 욕을 못하게 되어 김이 빠진 채로 영화의 남은 30분을 마저 보았다. 여주 역할의 고아성이, 소설가를 꿈꾸던 변요한 역의 회사 선배에게 자신의 스토리로 출간된 소설을 선물로 받는다. 포장을 푸는데 소설 표지의 제목이 너무 익숙한 거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였다. 엥? 이거 나 재밌게 읽은 소설인데? 심지어 박민규 작가 소설 좋아하는데? 설마 소설 내용 영화로 만든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냐. 충격의 엔딩 크레딧을 보며 찾아본 영화는 해당 소설을 원작으로 2024년 크랭크인 되었으나, 2026년에야 넷플릭스를 통해 최근 개봉(?)된 상황이었다. 넷플릭스 영화에 개봉이라는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한자 자체는 봉인을 연다는 뜻이니까 써도 되는 거 같고, 암튼 영화소개 글에서 찾아보니 내가 욕바가지를 하던 문상민 배우의 생애 첫 영화작품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소설 자체가 2009년 소설이니까 15년 이상 지나 영화로 개봉하려면 스토리를 많이 고쳐야 했을 거 같기 한데, 영화 끝날 때까지 소설을 떠올리지 못한 내 자신의 붕어 기억력도 너무 한탄스러웠다. 예전에 소설을 읽을 때 책표지 서양화 여자의 추한 외모가 너무 각인되어서 여자주인공인 고아성과 매치가 안 되어서 그런 거 같기도 한데 그럼에도 너무 충격적이긴 했다.
그래서 남주 욕을 더 하기로 했다. 저 녀석이 연기만 더 잘했어도 내가 기억을 했을 거잖아. 나의 기억력은 문제가 없고, 저 녀석의 몰입 하나도 안 되는 연기력이 문제인 거 맞겠지. 지금도 은애하는 도적님아를 유튜브 무한재생으로 틀어놓고 연기력을 감추기 위한 멀끔한 모습에 반해 헤벌레 하고 있는 아내 얼굴을 보니 부아가 치미면서 마음속에서 찰진 욕이 속사포 랩으로 튀어나왔다.
저 녀석이 2년 만에 장족의 연기력 발전을 하여 감동적인 사극의 젊은 왕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난 당분간 저 사극은 안 볼게 확실하니깐 확인은 못하겠다. 설마 이것도 아재좀비 이론의 부록 정도의 챕터에 추가될 내용이려나. 아내가 좋아하는 젊은 아이돌 혹은 드라마 남자주인공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 아아. 그런 거면 내가 너무 없어 보이는데 어쩌면 좋으냐.
문제는 아줌마들이 껌뻑죽는 허여멀건한 얼굴에 키크고 멀끔한 젊은 남주가 끊임없이 드라마나 스크린에 데뷔를 한다는 사실이다. 이건 아재좀비가 아니라 아줌마좀비 이론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야하는 분야인 거 같은데, 내가 여자가 아니라서 심오한 이론체계를 정립하지 못할 것 같아 섣불리 손을 못대겠다.
솔직히 나는 대화 안통하고 얼굴만 이쁘장한 젊은 여자애들 보다는, 위트있는 대화 통하고 내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내 나이대의 여자들이 훨씬 좋은데 요건 또 새로운 글로 써볼까 말까 고민중이다. 나중에 글 쓰게 되면 붕어 기억력이니까 붕어 인지력이라고 그냥 좋게 생각하고 넘어가주시면 좋겠다. 아재좀비 이론의 예외케이스라 아직 명쾌하게 설명이 안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