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친으로 세계일주_김범석
“오늘 약속은 취소된 걸로 알겠습니다.”
약속 전날에도, 당일 오전에도 답이 없어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여전히 답장은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겠거니 생각했지만,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당일에 약속을 파토 내는 사람인지라 적잖이 기분이 언짢았다. 그런데 다음 날, 그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술을 마시고 폰과 지갑을 통째로 잃어버렸다는 그의 슬픈 메시지. 그놈의 술 때문에 원래 만나기로 했던 일정보다 2달이나 늦게 만나게 되었다. 그래도 난 다 이해했다. 동병상련의 감정을 그에게 느꼈기 때문에.
내가 그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그가 연극을 그만둔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여행했던 사람들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연극을 계속하는 사람, 경제적 어려움을 딛고 꿋꿋이 음악을 하는 사람과 같은 끈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한 번쯤은 꿈을 포기하고 흔히 말하는 현실로 복귀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꿈을 포기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은 없는지. 꿈을 포기한 지금은 행복한지.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 당일. 그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형님, 20분 정도 늦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20분이 아니라 1시간이나 늦은 그는 굉장히 해맑은 얼굴을 하고 내 앞에 앉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처럼 정말 죄송하다면서 싱글벙글 웃으며 사과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는 뭔가 굉장히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나는 친구였다.
“그래서 왜 연극을 그만뒀는데?”
생각보다 늦어진 일정 때문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 힘들어서요.”
그는 한 극단에서 일을 했었다. 대학도 나오지 않은 그가 연극을 시작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극단으로 들어가 무급으로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극단에 들어간다고 해서 바로 연기를 배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가 하는 일은 선배들이 설 무대를 세팅하고 어깨너머로 선배들의 연극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어깨너머의 무급 수업이 나쁘지는 않았다. 무대에 선 선배들을 보며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감정을 공유하는 방법 등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활은 나이지지 않았다. 편의점 야간 알바를 2년 동안 하며, 햇빛이 간신히 들어오는 고시원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진짜 돈이 없을 때는 라면 하나로 4일을 버텼어요.”
“라면 하나로? 그게 가능해?”
“라면 하나를 4등분을 해서 하루에 한 끼씩 4일을 먹었어요. 고시원에 밥하고 김치는 있었거든요.”
라면 하나로 4일을 버티다니. 나라면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활을 버텨가면서 연극을 했던 이유는 뭐였을까? 아니, 그렇게 애써 버텨온 연극을 단지 힘들다고 그만둔 이유는 뭐야? 여러 가지 의문점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게 버텨온 걸 그만둔 게 아깝거나 후회되진 않아?”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무 힘들어서 그만뒀지만 후회는 없었어요.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정말 그 당시에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거든요. 아까 행복이 뭐냐고 물으셨죠? 전 후회 없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해요. 하루하루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고 후회 없이 사는 삶이요.”
연극을 그만둔 걸 정말 후회하지 않느냐고 계속해서 되물었다. 그는 정말 후회가 없다고 대답했다. 연극을 그만둔 일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살아오면서 했던 모든 선택들에 대한 후회는 없다고 했다.
“제가 후회 없이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건, 아버지 영향이 커요.”
그의 부모님은 일찍이 이혼을 하셔서 어머니는 어릴 적에 집을 떠났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가 20살 때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이제 자신이 책임질 사람은 온전히 자신뿐이었다. 그가 선택을 할 때 동의를 구해야 할 사람도 없었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온전히 그 자신이 져야만 했다. 그리고 그가 후회를 남기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남겼던 말이 큰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는 간경화로 돌아가셨어요. 누나가 아버지를 위해 수술대에 오르려 했지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거절했어요. ‘난 지금까지 내 삶을 후회 없이 살아왔다. 근데 내 목숨 때문에 딸의 배에 흉터를 생기게 한다면 죽어서도 후회할 것 같다.’ 아버지가 참 원망스럽기도 하고 싫기도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멋있어 보였어요. 아버지를 보내드리면서 생각했어요. 나도 내 삶을 후회 없이 살아갈 거라고.”
얼마 전, 한 친구의 소개로 한 탈북자 친구를 만났다. 탈북자 친구를 만나는 게 처음이라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 고민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대화 주제가 자연스럽게 꿈과 행복으로 이어졌다. 그는 자신이 탈북하는 과정에서 겪은 한 사건 덕분에 꿈과 행복에 대해 강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대부분은 목숨을 걸고 국경 지대를 넘어서 탈북을 시도해요. 근데 저는 국경지대에서 떨어진 지역이라 바다를 건너야만 했어요. 바다를 건너기 위해선 배가 필요했고, GPS 같은 장비들도 필요했죠. 그런 장비들을 모두 갖추는 데까지 2년이란 시간이 걸렸어요. 근데 저는 그 시간들이 너무나 행복했어요. 왜냐하면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내려가는 게 제가 정말로 바라고 원하는 꿈이었기 때문이에요. 내 꿈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는 그 시간들이 너무나 행복했죠.”
국경지대를 넘어가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바다를 건너 탈북을 시도하는 것은 더욱더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다. 성공할 확률보다 실패할 확률이 더 많은 탈북이지만, 그는 그것을 준비하는 기간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나룻배와 GPS를 마련하고 그는 바다로 향했다. 그런데 바다로 떠난 지 하루 만에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GPS가 고장나버린 것이다.
“나룻배 위에서 GPS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열심히 노를 저어 움직이고 있었어요. 근데 파도가 거세게 치더니 바닷물이 배 위로 자꾸 들어오는 거예요. 정신없이 물을 퍼냈는데 나중에 보니 GPS에 물이 들어가 고장나버렸죠. 참 막막했어요. 망망대해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죠. 정말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어요. 근데 갑자기 웃음이 나더라고요. 바다 한가운데서 미친 듯이 웃었어요. 제가 왜 웃었는지 알아요? 곧 죽을지도 모르는 바다 한가운데 있었지만, 그 순간 너무 행복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왜냐면 그걸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말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 몰라도 2년 동안 준비했던 내 꿈을 실행하고 있는 그 순간이 너무 행복했어요.”
그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몰랐지만 포기하지 않고 미친 듯이 노를 저었고, 정말 기적과도 같이 대한민국 땅에 도착했다. 눈앞에서 산 증인이 이야기를 하는데도 믿기지 않는 스토리였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진실이었다.
그의 탈북 스토리만으로도 충분히 흥미 넘치고 감동적이었지만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그다음부터였다. 그는 자신이 한국에서 만난 한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한국에 들어와서 사귄 한 친구가 있어요.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친구였죠. 근데 4년이 지나도록 합격을 못하는 거예요. 근데 그 친구가 어느 날, 저에게 낙담한 표정으로 다가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변호사라는 꿈을 꾼 게 너무 후회된다.’ 전 그 친구에게 따끔하게 이야기했죠. 네가 변호사라는 꿈을 품은 걸 후회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준비했던 과정을 불행하게 생각하고 후회한다면 그건 정말 네 꿈이 아니었던 거라고 말해줬어요. 정말 자신의 꿈을 꾸는 사람들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은 조금 남을지언정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죠. 그럼 결과를 떠나 행복할 수 있어요.”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어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탈북에 성공해 대한민국 땅을 밟겠다는 선택을 절대 후회하지 않았던 그였기에, 친구에게 그런 쓴소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 선택에 정말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는 남지 않는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더 힘을 쏟을 수 있는 여지로 인해 짙은 후회가 남는다. 그렇다면 후회를 남기지 않는 방법은 자신이 선택한 일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 범석이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제가 다시 연극을 시작할 수도 있고, 다른 일들을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뭘 하든 후회 없이 최선을 다 하려고 노력할 거예요. 그게 곧 행복이니까요."
너무 늦은 시간 때문에 서둘러 집에 가는 길에 라면 하나로 4일을 버텨내며 연극을 고집했던 그와 나룻배로 망망대해를 건너 탈북했던 그를 떠올리며 나를 한 번 돌이켜보게 되었다. ‘내가 무언가에 후회를 남기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 해본 적이 있나? 내가 목표로 하는 것에 있어서, 이성 간의 관계에 있어서,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전혀 후회를 남기지 않고 온전히 쏟아내 본 적이 있을까?’
선뜻 ‘그렇다’라고 대답하기 어려웠다. 반면, 후회하지 않느냐는 내 물음에 선뜻 ‘그렇다’라고 대답한 범석이의 싱글벙글한 얼굴과 그가 내게 했던 말이 내 귀에 맴돌았다.
형 저는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제 모습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전 지금 행복해요. 제가 한 선택들에 후회가 없으니까요. 정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