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친으로 세계일주_배우 박원빈
“우리 바닥에서 통하는 진리가 있어. 뭐냐면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하다는 거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결국 성공한다는 거지.”
늦은 나이에 연기에 뛰어든 내 친구가 술에 취해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 친구에게 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 중에서 끝까지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 살아남는다고 해서 모두 다 별이 될 수 없다는 건, 가혹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대학시절, 나는 연극영화과 친구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연기 교양 수업을 들었다.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배우라는 명확한 꿈을 향해 달려가는 그들의 모습이 당시의 나에겐 선망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그들을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나보다 더 두꺼운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있었다. 사회는, 현실은 그들에 대한 내 동경의 마음을 안타까움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연극뿐만 아니라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돈으로 대변되는 현실이라는 벽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거대한 벽 앞에서 뒤로 돌아서거나, 계속해서 부딪치다가 산산조각 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벽을 뚫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또는 현실의 벽에 계속 부딪쳐 쓰러지지만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절대 꿈을 놓지 않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보며 희망한다.
‘나도 끊임없이 위기가 닥쳐오겠지만 절대 포기 하지지 말아야지. 어떻게든 저 벽을 뚫고 지나가야지.’
오늘은 배우 박원빈이라는 세계를 여행하는 날이었다. 카페에 도착해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차를 가져왔는데 주차 공간이 없어서 10분 정도 늦을 것 같습니다. 빨리 주차하고 갈게요. 죄송합니다.”
이 사람이 전화를 동굴에서 받나 착각할 정도로 깊은 목소리였다. 10분 뒤, 한 남자가 카페로 들어왔고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저 사람이 박원빈이라는 걸 알아챘다. 목소리부터 외모까지, 역시 배우는 배우였다. 그는 자리에 앉아 커피도 시키지 않은 채,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까지 10년이 넘게 연기를 해왔지만 처음부터 연기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사진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형이 일하는 극단에 놀러 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를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찍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찍힘을 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굉장히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의 행동 또한 단순했다. 배우가 되기 위해서 연극과에 입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곧바로 학원을 등록했다. 운이 좋아서인지 타고난 실력 때문인지 지원했던 모든 대학의 연극과에 합격을 했다.
그렇게 입학한 대학을 10년 동안이나 다니게 될 줄, 그 당시엔 누가 알았으랴. 그에게 대학 입학은 쉬웠지만 학교를 계속해서 다니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한 학기 학비를 내기 위해 1년 동안 휴학을 하고 미친 듯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런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가까스로 빚 보증서인지 졸업장인지 모를 종이 쪼가리를 받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벌써 서른이었다.
힘들게 졸업했지만 졸업 자체가 해결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배우가 들어갈 구멍은 바늘구멍 같았고, 스크린에 얼굴을 알리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영화 판에 있던 동료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떠나가는 동료들을 보면서 그의 마음은 얼마나 암담했을까.
"난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안 있으면 내가 톱스타가 되어있을 줄 알았어. 근데 입학하고 나서 얼마 안 있으니까 군대를 가야 되더라? 그래서 군대를 갔다 오니까 20대 중반이 돼버린 거야. 전역을 하고 나서는 내가 졸업을 하고 27살쯤에는 스크린에 얼굴을 내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어쩌다 보니 서른 살에 졸업을 하게 됐네? 졸업 후에도 살아 남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다 보니 이젠 서른일곱이 되어버렸어. 스크린에 나오는 스타들은 말 그대로 별 같은 존재들이야. 그리고 그 별 주변에는 아직까지 반짝거리지 못하는 수많은 별들이 있지."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힘들지언정 배우라는 꿈을 절대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하지만 배우라는 꿈을 손에 쥐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돈이라는 족쇄는 그의 발목을 점점 더 강하게 조여왔다. 연기를 사랑하는 것과 생존이 위협을 당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그도 어쩔 수 없이 한 기업에 입사를 한 적이 있었다. 먹고는 살아야 했으니까. 입사 이유야 어찌 됐건 그는 일을 대충하지 않았다. 입사 전, 그가 제안한 제안서를 회장이 직접 보게 되었고 남들보다 월등한 계약 조건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입사한 후에도 남들보다 월등히 좋은 실적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일을 시작한 지 1년이 되지도 않아 팀장의 자리를 제안하는 기업에게 그는 돌연 사표를 내밀었다. 굉장히 뜬금없는 퇴사 이유를 궁금해하는 나에게 그는 퇴사의 이유를 딱 한 문장으로 이야기했다.
그건 내 길이 아니었으니까.
저 짧은 문장은 내 가슴에 묵직한 펀치를 날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형사 1, 행인 3으로 불리는 단역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스크린 상에서 몇 초만에 사라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수없이 좌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힘든 것은 배우의 꿈을 흔들리게끔 자신을 유혹하는 수많은 다른 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배우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힘들게 지켜온 자신의 길을 단순히 돈 때문에 놓아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배우의 길은 박원빈이라는 사람,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이었을 테니까.
2년 전, 난 돈을 모으기 위해 가장 힘들다는 3대 영업 중 하나인 제약 영업에 뛰어들었다. 당시에 무엇을 해야 할지, 무슨 직업을 선택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하지만 어떠한 삶을 살겠다는 삶의 그림은 확실했다. “청년들에게 감동을 주고받는 행복한 삶.” 그것이 당시 내가 만들었던 내 삶의 목적이며,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는 삶의 의미였다. 그땐 지금과 같이 눈에 띄는 활동들을 하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청년들을 만나서 삶의 고민에 대한 이야기,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를 들려줄 때, 그들이 내 덕분에 고민이 덜어졌다며 고맙다고 할 때, 너무나 큰 감동과 즐거움이 있었다. 하지만 집에 와서는 항상 월세, 식비, 생활비에 쫓기며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그리고 즐거움보다 불안함의 크기가 점점 더 커져가던 스물여덟, 일단 취업을 하고 나중을 기약하자며 제약 영업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다.
“야, 너 뭐하냐? 정신 안차려? 이 새끼가 빠져가지고.”
“죄송합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한 달에 한 번 전국의 모든 영업사원들을 모아 영업 회의를 했다. 사실 말이 회의지, 부진한 실적에 대해서 탈탈 털리는 날이었다. 앞에선 선배들이 실적 발표를 하고 있었지만, 입사한 이후 매일 알 수 없는 자괴감을 느끼던 나는 도저히 회의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책상 모서리를 바라보며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멍을 때리다 선배에게 욕을 먹었다. 단순히 일이 힘들었던 건 아니었다. 수습 기간에 내가 하는 일은 선배를 따라다니며 어떤 일을 하는지 구경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불면증이 지속되고 계속해서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것도 아닌데, 내가 하는 거라곤 고작 선배들 따라다니면서 어깨너머로 업무를 구경하는 게 전부인데 나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정도로 악몽은 심해졌고 나는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러다간 3년을 버티기도 전에 내 삶의 의미를 송두리째 잃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또다시 주변의 만류를 무시하고 일을 그만뒀다. 그날 밤, 나는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불면증과 악몽의 원인은 일 자체에 있지 않았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나의 가치관과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괴리감이었다. 내가 지금 제약영업 일을 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합리화했지만 결국 자기기만일 뿐이었다. 3년 뒤에 돈을 모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건, 그저 불안 앞에 쓰러지는 나 자신이 비참해서 둘러댔던 핑계였다. 남들에게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잠시 쉬어가는 거야.”라고 말했지만 속마음은 ‘이 일도 3년 동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적응되겠지. 그런 삶도 나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크나큰 스트레스였고 그게 곧 불면증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삶, 가고자 하는 길의 주변에는 항상 불안이 존재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불안의 크기는 커졌고, 그 불안은 내 삶에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을 잊게 만들었다. 오직 돈을 외쳐대는 환경 속에서 청년들과 감동을 주고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겠다는 내 삶의 목적, 몇 년간의 방황과 고민을 통해 만들어냈던 내 삶의 의미를 불안이란 놈 때문에 놓칠 뻔했다. 그런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지고, 나 자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퇴사를 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내 길 위에 서 있었다.
“내 길이 아니었으니까.”
왜 일을 그만뒀냐는 질문에 대한 너무나 명쾌한 원빈이 형의 대답은 나를 뭉클하게 했다. 나보다 훨씬 더 큰 불안과 힘든 과정을 겪어왔을 텐데, 현실의 벽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은 형을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현실의 벽을 마주하며, 그 벽을 뚫고 나가기 위해 자신의 길 위에 서 있는 형을 보며 다짐했다.
‘다시는 나 자신을 속이지 않으리라. 계속해서 현실의 벽을 마주하며 내가 선택한 길 위를 걸어가리라.’
형 아니, 박원빈이라는 배우는 10년 넘게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 길을 걷다 보니 영화에서 주연이라는 자리도 얻게 되었고, 드라마의 조연이라는 자리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가 배우라는 사실을 모른다. 뭐, 그래도 큰 상관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알아주든 못 알아주든, 단역이든 주연이든, 그는 항상 배우라는 그 길 위에 서 있을 테니까.
형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밤이 늦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형은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내가 배우라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 이유도 그래. 나 자신을 사랑하니까.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행복하다는 걸 나 스스로가 아니까. 왜 이걸 하냐면 이걸 할 때 내 존재가치를 느끼거든. 나 스스로한테 이걸 할 때 제일 고마워. 남들이 못 알아봐도 돼. 막 이걸 통해서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 스스로한테 기쁘고 싶어서 하는 거야.”
배우라는 꿈을 놓지 않았던 그, 현실의 벽을 마주하며 끝까지 싸워왔던 그의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 같았다. 박원빈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본 느낌이었다. 그리고 좋은 영화가 그렇듯이 그는 짙은 여운을 남겼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행복을 위해 그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 짙은 여운과 함께 그의 이야기가 머리가 아닌 내 가슴속에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