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의 사진

by 김혜진

오후가 되자 골목의 그림자가 길게 허리를 늘였다.

가게 깊숙이 들어오던 햇살도 어느새 한 뼘 뒤로 물러나 발치에서 머뭇거렸다.


강 노인은 카운터에 앉아 박 여사가 두고 간 꼬깃꼬깃한 지폐를 정돈했다.

돈의 액수보다 그 종이에 배어든 세월의 무게가 손바닥을 묵직하게 눌러왔다.


그때, 가게 유리문 너머로 낯선 듯 익숙한 그림자가 비쳤다.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말끔하게 다려진 코트 차림에 가죽 서류 가방을 든 모습은, 페인트가 비늘처럼 벗겨진 이 낡은 골목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았다.


"어서 오......"


강 노인이 인사를 건네려다 입을 다물었다.

남자의 짙은 눈매 위로 아주 오래전, 가게 앞 평상에 엎드려 침을 발라가며 숙제를 하던 꼬마의 얼굴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코끝에 땀빵울이 맺힌 채 백 원짜리 동전을 꼭 쥐고 달려오던 아이.


"저...... 혹시 민수냐?"


남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잔잔하게 번졌다.


"여전하시네요, 할아버지. 저 민수예요. 앞집 살던 꼬맹이 민수."


"아이고, 이게 누구야! 너 이 동네 떠난 지가 벌써 십 년도 훨씬 넘었지? 완전히 어른이 됐구나, 어른이."


강 노인은 반가움에 돋보기안경까지 고쳐 쓰며 민수의 어깨를 툭툭 쳤다.

꼬맹이 시절 민수의 정수리만 보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제는 고개를 한참 추켜올려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만큼 몰라보게 커 있었다.


"어허, 녀석. 키는 언제 이렇게 컸어? 네 아버지를 쏙 빼닮았구나."


"할아버지는 그대로 세요. 여전히 정정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그대로긴 뭐가 그대로야. 뼈마디에선 소리가 나고 눈은 침침해서 손님 얼굴도 못 알아보는데. 그런데 너, 이 시간에 회사는 어쩌고 내려온 거야? 평일 아니냐?"


"그럼요. 근데 오늘 아니면 다시는 못 올 것 같아서요. 팀장님한테 한소리들을 각오하고 아침부터 서둘러 왔습니다."


민수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 해맑은 미소 끝에 어릴 적 장난기 많던 꼬마의 잔상이 스쳤다.


강 노인은 뭉클해지는 마음을 감추려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계산대 안쪽을 가리켰다.


"잘 왔다. 정말 잘 왔어. 그래도 밥은 챙겨 먹고 온 게지?"


"네, 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대충 때웠어요. 그보다 할아버지, 가게가 하나도 안 변했네요."


민수는 그리운 듯 가게 구석구석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길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계산대 옆, 지금은 치워지고 자국만 남은 낡은 오락기 자리였다.


"여기서 할머니 몰래 뽑기 하다가 들켜서 혼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정말 빠르네요."


민수는 잠시 옛 생각에 잠긴 듯 미소 짓더니,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봉투 겉면에는 마치 아주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민수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닿아 있었다.


"이거, 저희 어머니가 오랫동안 장롱 깊숙이 간직하시던 거예요. 오늘 할아버지께 꼭 전해드리고 싶어서 가져왔습니다."


강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세월의 빛이 바랜 낡은 나무 액자 하나였다.


사진 속에는 20년 전의 행운슈퍼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생생한 실내 간판 아래, 먼지 하나 없이 정갈하게 쌓인 통조림과 과자 봉지들이 배경을 메우고 있었다.


진열대 앞 평상 위에, 어린 민수와 아내 정숙이 서로의 어깨를 맞댄 채 앉아 있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해맑게 웃고 있는 민수와, 그런 아이를 곁에서 인자한 미소로 품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세월을 이겨내고 선명하게 살아있었다.


"이 사진을...... 네가 여태 가지고 있었구나."


강 노인은 갈라진 손끝으로 사진 속 아내의 얼굴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그녀는 사진 속에서 여전히 서른여덟의 고운 얼굴로, 마치 지금의 남편을 위로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늘 말씀하셨어요. 가게는 우리 가족한테 집보다 더 따뜻한 울타리였다고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집세 낼 돈도 없어서 막막했던 시절, 아주머니가 매일 아침 건네주시던 따뜻한 우유 한 병이 어머니를 다시 살게 했다고요."


민수의 낮은 목소리가 가게 안의 정적을 메웠다.

강 노인은 벌어진 입을 차마 다물지 못했다.


아내는 그에게 조차 생색 한 번 내지 않고, 조용히 골목 사람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맙다, 민수야. 정말....... 내 평생 가장 귀한 선물을 받았구나."


강 노인은 액자를 가슴팍에 꼭 껴안았다.

딱딱한 나무틀의 감촉이 심장 박동과 맞닿았다.


30년 만에 셔터를 내리은 오늘, 그는 비로소 혼자가 아니었음을.

정숙이 남긴 사랑이 이토록 단단한 열매가 되어 돌아왔음을 깨닫고 있었다.


"할아버지, 이제 가볼게요. 가게 잘 정리하시고요. 나중에 꼭 다시 찾아뵐게요."


민수는 노인의 굽은 어깨를 가볍게 한 번 안아주고는 가게 문을 나섰다.


드르륵, 댕—.


경쾌하면서도 쓸쓸한 종소리가 다시 한번 가게 안을 채웠다.

멀어지는 민수의 뒷모습을 보며 강 노인은 품에 안은 액자를 다시 한번 고쳐 쥐었다.


가게 안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지만, 아까와 같은 무거운 공기가 아니었다.

먼지 섞인 햇살 속에서도 정숙의 온기가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듯했다.


강 노인은 카운터 옆 낡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아내가 생전에 늘 하던 말처럼, 마음이 한없이 포근해져 오고 있었다.

수,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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