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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 Feb 25. 2024

춤추는 기분


©sumgoodeats


내 안에 소리치는 생각들이 있다. 그 생각들은 발화되길 원하고, 문장으로 기록되길 원한다. 그 열망은 예상보다 힘이 세다. 무시하면 몸은 공격당한다. 생각은 내 몸을 깨부수고 터져 나가고 싶어 했다. 게으름으로, 무신경함으로, 때로는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막아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점점 병들어 갔기에. 신을 허락하지 않아 신병에 드는 사람처럼 시름시름 앓다 생기를 잃는 것처럼. 전혀 잠들 수 없고, 전혀 먹을 수 없고, 시끄러운 머릿속을 견디지 못해 침대 위에 얼굴을 파묻고 데구르르 구르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춤을 춘다. 처음엔 미용 목적으로 회사 근처 발레학원을 약 두 달 정도 다니다가 집 근처에 있는 무용학원으로 옮기면서 ‘춤’을 추게 되었다. 정통 발레를 꾸준히 배울 것을 기대하며 간 이 학원의 커리큘럼은 타 학원들에 비해 상당히 독특했는데, 모든 수업이 결국 ‘자신을 표현하는 몸을 가꾸자’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현대무용 수업은 본격적으로 춤을 출 수 있는 시간이었고, 나는 춤을 춘다기보다 바닥을 구르고 땀 흘리며 달리고 기어 다니는 것이 그렇게나 재밌었다.



기분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불안의 근원은 두 가지다. 기분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하다는 것, 기분이 곧 나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대로 기분을 완전히 놓친 채로 살아갈 수 있을까. 매순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텅 빈 존재로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누군가 찍어준 사진 속 나는 표정이 다양하다. 얼굴 근육을 많이 써서 표현하려 애쓴 노력이 사진마다 담겨 있다. 남들보다 좀 더 과장되어 보이고 웃겨 보인다. 근사하진 않아도 난 그때를 정확히 떠올릴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진을 갖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거울을 잘 보지 않는다. 표정이 거의 없고 내 모습을 별로 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거울이 불필요하게 느껴질 정도다. 콘택트 렌즈도 거울 없이 잘 낄 수 있다. 


아주 많이 웃으며 지내지 못했다. 거의 미간을 찌푸리고 있거나 눈을 뒤집고 있거나 입을 이죽거리고 있거나 수심이 가득해 낯빛이 어두운 얼굴이었다. 거울을 보며 내 모습을 가꿀 때엔 본 적 없었던 진짜 내 얼굴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불편함이었다. 나는 즐겁기를 원한다. 우울할지라도 순간의 즐거움을 찾아 그 반짝하는 힘으로 하루를 잘 견뎌내고 싶고, 함께 많이 웃기를 바란다.


나는 너무도 진지하고 유머가 부족한 사람이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지금 내가 처한 상황, 무엇보다 나를 압도해버리고 내가 더 나서서 진두지휘해야 할 순간을 욕망에 빼앗기고 만다. 그럼 항상 결과가 좋지 않았다. 실수가 많았다.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은 적도 많지만, 그럴 경우엔  내가 너무 잘났다는 걸 드러내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이기도 했다. 늘 경직되어 있는 사람, 긴장한 사람, 애쓰는 게 눈에 다 보이는 사람. 몸에 잔뜩 힘을 주며 살아온 건 나만 아는 게 아니었다. 



무용학원을 옮긴 첫날 내 몸 여기저기를 만져본 선생님은 내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한 듯했고, 수업 시간 때 내 태도와 동장을 보며 일부분 나라는 사람을 정의 내렸음이 분명했다. 



그 모습이 진짜 내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있지만, 완벽히 부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모르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순간 나를 꾸며낼 수도 꾸밀 여력도 없다. 오로지 선생님이 지시하는 동작들을 수행하는 것만으로 벅차고, 그 시간에 집중하는 데 바쁘다. 이 한 시간 동안 온전히 몰입하고 싶다. 그런 열망만이 내게 남는다. 그런 감각은 아주 드물다. 내가 인지하는 시간 속에서 내가 원하는 것이 오로지 하나인 적이 내게는 드문 경험이기 때문이다. 아 물론 한 가지 생각을 더 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너무 집중해서 방귀를 뀌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것이다. 


웃고 싶어서 무용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나는 예쁜 몸을 갖고 싶은 열망을 여전히 놓지 못한 이유로 발레를 시작한 것일 뿐, 무용을 내 몸으로 향유할 수 있는 예술 활동이라고 생각해보지도 못했고, 사는 동안 직접 그 동작들을 하게 되리라는 것 또한 예상하지 못했다. 무용학원을 등록해놓고 대체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놀랍게도 나는 그곳에서 발레복을 입고 피티 같은 걸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벌써 무용을 시작한 지 햇수로 3년. 3년이라고 하니까 제법 오래한 느낌이다. 하지만 여전히 초보다. 요가는 3년쯤 했을 때, 오만방자함을 떨 정도로 고인물 에너지를 흉내라도 낼 수 있었지만 무용은 아니었다. 매 수업마다 새롭고 어렵다. 쉬이 익숙해지지도 않는다. 이렇게까지 못하는데 왜 그만두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번번이 이 이유로 돌아왔다. 무용을 좋아한다는 것.


나는 왜 무용이 좋을까.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데엔 책임이 따를 수 있고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는 개인 정보임에도 왜 이렇게까지 떠들고 싶어 하는 걸까. 이제야 조금 알겠는 건 지금의 나 자신과 마주하는 경험에 탄복해서인 것 같다. 


무용은 현재 시점의 나를 대면하는 행위다. 가장 최신의, 현재 진행형의 시점을 체감케 하는 행위다. 어떤 마음으로 몸을 움직이는지, 수업 직전에 무얼 먹어 몸이 이토록 무거운지, 왜 집중하지 못하고 안정적으로 회전을 할 수 없는지, 지난주엔 할 수 있었던 동작이 오늘은 왜 안 되는지, 오늘은 어쩐 일로 스플릿이 되는지 등 모든 게 나를 점검할 수 있는 체크 리스트가 된다.


나는 언제나 나를 가장 나중으로 미뤄두었기에 이 시간마다 나에게 집중하는 일이 좋았던 것 같다. 이 마음을 깨닫게 된 건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대체 무용이 왜 좋은지 스스로 답을 내지 못했는데, 연습에 몰두한 순간, 동작에 몰입한 순간 내가 내 몸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무용에 대한 내 마음을 깨닫게 된 거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이다. 갈피가 잡히지 않던 재교를 장악한 느낌이랑 유사하기도 하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난 느낌이기도 하다.



나를 미룰 수도 없고 누군가를 챙길 수도 없는 것이 무용이다. 오로지 내가 내 마음의 무게추 내 중심에 두고, 내 몸이 다치지 않도록 정신을 동작에 집중하고, 내 몸은 최대 능력치를 발휘해 동작을 구현하는 것. 그것이 내게는 무용이다. 


춤추는 기분은 여전히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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