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기획노동자가 사라진 집

이건 누가 할래? (기획노동)

by 곽작가

아프다고 상상해보자.

심하게 아픈 것도 아니다. 독감 정도. 일주일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 몸은 누워있고, 머릿속도 멍하다. 평소에 하던 생각들이 잘 되지 않는다. 그냥 쉬어야 한다.

처음 하루 이틀은 괜찮다. 가족들이 알아서 한다. 배달을 시키거나,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대충 해결한다. 아이도 스스로 챙기는 것 같다. 별일 없어 보인다.

사흘째부터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냉장고를 열면 뭔가 어수선하다. 재료가 있는데 아무도 어떻게 쓸지 모른다. 어제 산 채소가 그대로다. 아이가 내일 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뒤늦게 말한다. 청구서 납부 문자가 와있는데 아무도 처리하지 않았다. 세탁기에 빨래가 들어간 채 반나절이 지났다. 누가 돌렸는지 아무도 모른다.

일주일이 지나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집 안이 묘하게 어수선하다. 크게 망가진 것은 없다. 하지만 뭔가 여러 군데가 조금씩 틀어져 있다.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이 기획노동자가 잠시 멈췄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기획노동은 가정이라는 시스템의 운영체제다. 컴퓨터로 치면 윈도우나 맥OS 같은 것.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이 작동한다. 운영체제가 멈추면 앱들이 하나씩 오작동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작은 오류다. 그러다 점점 커진다.

기획노동이 멈춘 가정은 딱 그런 모습이다.


처음엔 작은 것들이다. 생필품이 떨어진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아이 준비물을 전날 밤에 허둥지둥 챙긴다. 냉장고 재료가 계획 없이 쌓이다가 버려진다. 공과금 납부가 하루 이틀 늦어진다. 각자 일정이 겹쳐서 낭패를 보는 일이 생긴다. 이것들은 작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작은 오류들이 쌓이기 시작하면 가정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왜 이걸 안 샀어. 왜 말을 안 했어. 이걸 내가 꼭 말해야 알아. 자꾸 이런 대화가 늘어난다. 짜증이 묻어있다. 이 짜증의 정체는 서로를 향한 것이 아니다. 사실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이다. 하지만 그 불안이 향할 곳을 찾지 못하면 결국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향한다.

재정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계획 없이 지출이 이루어지면 한 달 생활비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충동적인 소비가 늘고, 정작 필요한 것에 쓸 돈이 부족해진다. 미래를 위한 저축이나 투자 계획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린다.


관계도 헐거워진다. 기획노동은 단순히 집안 살림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 구성원 각각의 상태를 파악하고, 필요한 것을 예측하고, 관계의 리듬을 유지하는 것도 기획노동의 일부다. 부모님 생신을 챙기고, 아이의 컨디션 변화를 감지하고, 배우자가 요즘 유독 지쳐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 이런 것들이 멈추면 가족 사이의 연결이 조금씩 느슨해진다. 당장은 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라는 말이 나오는 날이 온다.

기업에 비유하면 이해가 쉽다. 실무팀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경영진이 없으면 회사는 방향을 잃는다. 오늘 당장의 업무는 돌아간다. 하지만 다음 달 계획이 없고, 자원 배분이 안 되고, 리스크 관리가 없으면 조직은 서서히 표류하기 시작한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가사노동이 이루어지고 있어도 기획노동이 없으면 가정은 방향 없이 그날그날을 버티는 상태가 된다.


그렇다면 기획노동자가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는 어떨까.

이혼, 사별, 혹은 오랜 출장. 갑작스럽게 한 사람이 가정에서 빠지는 상황. 이때 남겨진 가족들은 뒤늦게 알게 된다.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눈앞에 쏟아진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무슨 날짜에 뭘 해야 하는지, 무엇이 곧 떨어질 것인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그때서야 실감한다.


없어진 다음에야 보이는 것. 이것이 기획노동의 운명이다.

가사노동은 멈추면 바로 보인다. 청소를 안 하면 먼지가 쌓이고, 요리를 안 하면 밥상이 비어있다. 하지만 기획노동이 멈추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서서히, 조용히, 여러 곳이 동시에 어긋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사람들은 묻는다. 우리 집이 왜 이렇게 됐지.

답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곳에 있다.

누군가 생각하기를 멈춘 날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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