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누가 할래? (기획노동)
회사에는 직급이 있다.
신입사원은 주어진 업무를 처리한다. 대리는 팀의 일정을 조율한다. 과장은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부장은 사업 방향을 설계한다. CEO는 회사의 5년 후, 10년 후를 그린다. 같은 회사 안에서도 하는 일의 스케일이 완전히 다르다.
기획노동도 마찬가지다.
레벨이 있다.
오늘 저녁 메뉴를 정하는 것도 기획노동이다. 이번 주 장을 어떻게 볼지 계획하는 것도 기획노동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획노동의 가장 낮은 레벨이다. 가정에는 이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기획노동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가정의 방향 자체가 달라진다.
가정의 기획노동을 레벨로 나눠보면 이렇다.
레벨 1은 일상 운영이다. 식단 계획, 생필품 관리, 청소 주기, 일정 조율. 매일 혹은 매주 단위로 이루어지는 기획. 이것이 잘 돌아가야 가정의 하루하루가 안정된다.
레벨 2는 월간 운영이다. 생활비 예산 관리, 공과금 및 정기 지출 파악, 이번 달 특별한 일정 조율. 한 달 단위로 가정의 자원을 배분하는 기획. 이것이 흔들리면 월말에 늘 돈이 모자라거나, 중요한 날짜를 놓치는 일이 반복된다.
레벨 3은 연간 운영이다. 올해 목표는 무엇인가. 여행은 언제 갈 것인가. 큰 지출이 예정된 시기는 언제인가. 아이의 학년이 바뀌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1년이라는 단위로 가정의 흐름을 설계하는 기획. 이것이 있는 가정과 없는 가정은 연말에 전혀 다른 결산을 하게 된다.
레벨 4는 중장기 경영이다. 여기서부터가 가정의 진짜 경영이다.
내 집 마련은 언제,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사는 곳이 최선인가, 아니면 이사를 고려해야 하는가. 아이 교육의 방향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지금 직장을 계속 다닐 것인가, 아니면 변화가 필요한가. 노후를 위해 지금부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투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보험은 충분한가.
이것들은 단순한 살림의 문제가 아니다. 가정의 미래를 설계하는 전략적 의사결정이다.
이사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이사 갈까?"라는 말 한마디가 나오는 순간 실제로 시작되어야 하는 기획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지금 사는 곳의 계약 만료일은 언제인가. 이사 갈 지역은 어디가 좋은가. 아이 학교는 어떻게 되는가. 직장까지의 거리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예산은 얼마나 되는가. 전세인가 월세인가 매매인가. 대출이 필요하다면 얼마나 가능한가. 금리는 지금이 좋은가 나중이 나은가. 이사 업체는 언제 알아봐야 하는가. 현재 집의 보증금은 제때 돌려받을 수 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답을 찾고, 정보를 수집하고, 결정을 내리고, 실행을 관리하는 것. 이것이 레벨 4의 기획노동이다. 기업으로 치면 CEO와 CFO가 함께 앉아서 하는 일이다.
재정 계획도 마찬가지다. 매달 생활비를 맞추는 것은 레벨 2의 기획이다. 하지만 5년 후 내 집을 갖기 위해 지금부터 얼마를 모아야 하고, 어디에 투자해야 하고, 불필요한 지출을 어디서 줄여야 하는지를 설계하는 것은 레벨 4의 기획이다. 이 기획이 있는 가정과 없는 가정은 10년 후 전혀 다른 곳에 서있게 된다.
그런데 이 중요한 레벨 4의 기획노동이 가정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아예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다. 일상을 버티기에도 바쁜데 중장기 계획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 오늘 저녁 메뉴도 결정해야 하고, 이번 주 일정도 챙겨야 하는데, 5년 후 이사 계획을 언제 생각하겠는가. 레벨 1, 2의 기획노동에 치여서 레벨 4는 계속 뒤로 밀린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이제 어떻게 살지?"라는 질문 앞에 아무런 준비 없이 서게 된다.
둘째, 한 사람만 하는 경우다. 가정의 모든 기획노동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을 때, 레벨 1부터 레벨 4까지 전부 혼자 짊어지게 된다. 오늘 장을 봐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내년 봄 이사 가능 여부를 계산하고, 동시에 아이 중학교 진학 방향을 고민하고, 동시에 이번 달 카드값을 정산한다.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뇌 안에서 동시에 돌아간다.
이것은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 너무 많다.
기업이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는 CEO를 좋게 보지 않는 이유가 있다. 모든 결정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면 편향이 생기고, 맹점이 생기고, 번아웃이 온다. 그래서 좋은 조직은 의사결정을 나눈다. 각자가 자신의 영역에서 기획하고, 중요한 결정은 함께 논의한다.
가정도 하나의 조직이다. 그것도 꽤 복잡한 조직이다. 재정이 있고, 인사가 있고, 운영이 있고, 전략이 있다.
이 조직을 한 사람이 혼자 경영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다.
가정을 함께 경영한다는 것은 설거지를 같이 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가정의 1년 후, 5년 후, 10년 후를 함께 그린다는 것이다. 그 그림을 그리는 자리에 두 사람이 함께 앉는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아직 앉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 앉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