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누가 할래? (기획노동)
로봇청소기가 나왔다.
버튼 하나로 바닥을 쓸어준다. 식기세척기가 설거지를 대신하고, 건조기가 빨래를 말려주고, 의류관리기가 다림질을 줄여준다. 냉장고는 재고를 파악하고, 세탁기는 알아서 세제 양을 조절한다. 스마트홈 기기들은 조명을 켜고 끄고, 온도를 맞추고, 문을 잠근다.
가사노동이 줄어들고 있다. 분명히.
한 세대 전과 비교하면 지금의 가사노동 부담은 확연히 다르다. 손으로 빨래를 빨던 시대, 연탄불을 때던 시대, 시장에서 직접 손질하던 시대와 지금은 다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가사노동의 물리적 부담은 계속 줄어들 것이다. 앞으로 10년, 20년 후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가사노동을 기계가 대신할 것이다.
그런데 기획노동은 어떻게 될까.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기획노동은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정교해지고, 더 복잡해지고,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고 있다.
왜인가.
첫째, 선택지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한 세대 전에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살 수 있는 동네가 한정되어 있었고, 아이를 보낼 수 있는 학원이 몇 개 없었고, 저녁 메뉴도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선택지가 적으면 기획이 단순하다.
지금은 다르다. 이사 갈 동네를 고르는 것 하나에도 수백 개의 선택지가 있다. 아이 교육 방향만 해도 공교육, 대안교육, 홈스쿨링, 온라인 강의, 각종 사교육이 뒤섞여 있다. 여행 하나를 잡아도 항공사, 숙소, 일정 조합이 무한하다. 투자 상품, 보험 상품, 금융 서비스의 종류는 수십 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선택지가 많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획해야 할 것이 늘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은 선택을 하려면 더 많이 탐색하고, 더 많이 비교하고, 더 많이 결정해야 한다.
둘째,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한 세대 전에는 삶의 경로가 비교적 예측 가능했다. 좋은 학교를 나오면 좋은 직장이 있었고, 직장에 들어가면 정년까지 다닐 수 있었고, 내 집 마련의 시기와 방법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직업의 수명이 짧아지고, 산업이 빠르게 재편되고, 부동산과 금융 시장은 예측하기 어렵다. AI가 어떤 직업을 대체할지, 10년 후 어떤 기술이 중요해질지 아무도 모른다. 이 불확실성 속에서 가정의 미래를 기획한다는 것은, 안개 속에서 항로를 그리는 것과 같다.
불투명한 미래일수록 기획노동의 중요성은 커진다. 변화를 읽고, 리스크를 예측하고, 유연하게 방향을 조정하는 능력. 이것이 기획노동의 핵심이고, 이것은 기계가 대신해줄 수 없다.
셋째, 정보는 넘치는데 판단은 내가 해야 한다.
검색하면 나온다. 무엇이든. 어느 학원이 좋은지, 어느 동네가 살기 좋은지, 어떤 보험이 맞는지, 어떤 투자가 나은지. 정보는 넘친다.
"AI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나?"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맞다. AI는 좋은 답을 줄 수 있다. 평균적으로 괜찮은 답, 통계적으로 유리한 선택을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의 맥락을 아는 AI는 없다. 우리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우리 부부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우리 가정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 맥락 위에서 판단하는 것이 기획노동이다. 정보를 해석하고, 우리에게 맞는 결정을 내리는 것. 그것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넷째, 가사노동이 줄어든 자리에 기획노동이 채워진다.
로봇청소기가 청소를 대신하면,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한다. 더 쉬거나, 더 일하거나, 혹은 기획노동을 한다. 어떤 학원을 보낼지 알아보고, 이번 달 생활비를 정산하고, 다음 분기 재정 계획을 세운다. 가사노동이 줄어든 만큼 기획노동이 늘어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기계가 단순 반복 노동을 대신하면서 사람은 더 고차원적인 노동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니까. 하지만 이 변화를 인식해야 한다. 가사노동이 줄었다고 해서 전체 노동이 줄어든 것이 아니다. 노동의 성격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가사노동 분담 논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계가 가사노동을 줄여줄수록, 기획노동의 불균형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청소기를 돌리는 것은 기계가 하지만,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지를 기획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이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획을 누가 하느냐의 문제는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다. 지금 이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