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누가 할래? (기획노동)
기획노동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인류는 언제나 기획해왔다. 씨앗을 언제 심을지, 어느 땅에 집을 지을지, 겨울을 나기 위해 얼마나 비축해야 할지. 생존 자체가 기획이었다. 다만 그 기획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삶에 녹아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노동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과거의 기획노동
동양과 서양은 기획노동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조직해왔다.
동양에서 가정의 기획노동은 집단의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대가족 구조를 생각해보자. 집안의 기획노동은 위계에 따라 분배됐다. 제사를 언제 지낼지, 무엇을 준비할지, 누가 어느 역할을 맡을지. 이것은 가장과 어른들의 권한이었다. 여성들은 그 기획을 실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기획권과 실행권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었고, 그 분리는 나이와 성별과 위계로 결정됐다.
동양의 기획노동은 집단적이고 위계적이었다. 개인이 스스로 기획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기획에 편입되는 것이었다.
서양은 달랐다. 핵가족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길었던 서양에서 가정의 기획노동은 일찍부터 부부 단위로 이루어졌다. 어떤 땅을 개간할지, 어떻게 살림을 꾸릴지,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지. 이것은 부부가 함께 결정해야 하는 문제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성별 역할 분담은 엄격했다. 남성은 밖의 기획, 여성은 안의 기획을 담당했다. 하지만 가정이라는 단위 안에서 기획이 이루어진다는 점은 동양보다 명확했다.
산업혁명이 이 모든 것을 바꿨다.
남성이 공장으로 나가기 시작하면서, 가정의 기획노동 전체가 여성의 것이 됐다. 동양과 서양 모두 비슷한 방향으로 흘렀다. 밖에서 자원노동을 하는 사람과, 안에서 가사노동과 기획노동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이 구조가 수백 년간 이어졌다. 그리고 이 구조 안에서 기획노동은 더욱 깊이 보이지 않는 것이 됐다.
현재의 기획노동
지금은 다르다.
맞벌이가 보편화됐다.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두 사람이 모두 밖에서 일하는 가정이 표준이 됐다. 자원노동은 이미 나눠졌다. 가사노동도 나눠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됐다. 하지만 기획노동은 여전히 예전의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특히 그렇다. 한국, 일본, 중국의 조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다. 맞벌이 가정에서도 가정의 기획노동은 여전히 한쪽에 집중되어 있다. 아이 교육, 살림 운영, 명절 준비, 부모님 케어. 이것들의 기획은 여전히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돌아간다. 직장에서 동등하게 일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집의 기획은 여전히 불균형하다.
서양에서는 이 문제를 조금 더 일찍 인식하기 시작했다. 앞서 이야기한 엠마의 웹툰이 프랑스에서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페미니즘의 역사가 길고, 노동으로서의 가사 가치를 일찍부터 논의해온 곳에서 기획노동에 대한 문제 제기도 먼저 나왔다. 하지만 서양도 완전히 해결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많은 가정에서 기획노동의 불균형은 존재한다.
미래의 기획노동
앞 장에서 이야기했다. 기계가 가사노동을 대신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그리고 그럴수록 기획노동의 중요성은 커진다고.
더 넓게 보면, 기획노동은 단순히 가정의 문제가 아니다.
AI 시대에 가장 중요한 역량으로 꼽히는 것들이 있다. 비판적 사고, 창의성, 복잡한 문제 해결, 맥락적 판단. 이것들의 본질은 무엇인가. 주어진 데이터와 자원으로 최선의 방향을 설계하는 것이다. 그것이 기획노동의 핵심이다.
기획노동을 잘 하는 사람은 삶을 잘 설계하는 사람이다. 가정을 기획하면서 배운 것들 — 자원을 배분하는 능력,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 다양한 변수를 통합해서 결정을 내리는 능력, 구성원 각각의 필요를 파악하는 능력 이것들은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AI 시대에도 가장 필요한 역량이다.
동양에서는 오랫동안 기획노동을 위계 속에 가뒀다. 기획은 윗사람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개인이 자신의 삶을 기획해야 하는 시대다. 더 이상 집단의 기획에 편입되는 것으로 살 수 없다. 스스로 방향을 정하고, 스스로 자원을 배분하고, 스스로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서양에서는 개인의 기획 능력을 일찍부터 강조해왔다. 자기계발, 커리어 설계, 재정 계획. 이것들은 이미 교육과 문화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정작 가정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에서의 기획노동은 여전히 불균형하다.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를 가로질러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기획노동은 언제나 중요했다. 다만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미래에는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기계가 실행을 대신하는 시대일수록, 무엇을 실행할지를 결정하는 기획의 가치는 올라간다.
기획노동을 나눈다는 것은 그래서 단순히 가정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이 모두 기획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 능력이 가정을 지탱하고, 자녀에게 전수되고, 사회 전체의 역량이 된다.
기획노동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노동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정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막 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