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줄 요약
1. 별것도 아닌 증상 가지고 전부다 ADHD라길래 나는 아닌 줄 알았는데 내가 ADHD였음.
2. 근데 나는 다른 사람들한테 차분하고 꼼꼼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ADHD로 불편했던 적이 없음.
3. 그래서 다음편부터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삶을 바꿔왔는지 적어보려고 함.
"제가 ADHD라구요?"
"예, 한 번 약 먹으면서 경과를 보시죠. 용량을 봐야 하니, 일주일 뒤에 효과가 어땠는지 알려주세요."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정신과에 갔다.
별 다른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무기력증을 핑계 삼아 검진을 받아보고 싶었다.
마치 타로나 사주, 건강검진 같이.
사람을 나눌 때 어떤 것이 정상이라는 기준이 있지는 않다고 생각해서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받아들이려고 했었다.
'근데 ADHD는 아니지..'
차라리 다른 병명이 나왔다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자잘한 병명 중에 제일 큰 것이 ADHD였다.
내가 ADHD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ADHD 증상이 너무 보편적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신과에 가기 전에 물건 잘 흘리고 정신없고, 집중을 잘 못하는 것이 ADHD의 대표적인 증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숏츠에 나오는 ADHD의 특징을 보면서 한 두 개는 맞고 한 두 개는 아닌 내가 ADHD라는 건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나는 물건은 잘 잃어버리긴 하지만 그것도 어렸을 적 이야기이고 정리하는 방법을 생각한 뒤로는 크게 잃어버리진 않았었다. 술 먹고 나서를 제외하면.
또한 집중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나는 하루에 1시간이고 3시간이고 10시간이고 하고 싶은 대로 집중할 수 있다. 그래서 책을 쓸 때도 시간과 의지만 충분하다면(마감이 가깝다면) 초고를 2~3일에 써버린 적도 있었다. 정신없이 부산스럽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평가할 때, 보통 차분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특히 ADHD는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따라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데, 대화야말로 내가 ADHD가 아니라는 방증이었다. 내 화법은 그날 있었던 모든 대화의 포인트를 기억해 두었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서 비유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대화와 모든 화자, 모든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면 불가능한 화법이다. 게다가 내 지인 중에 실제로 대화에 집중을 못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 사람이 있었어서(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몇 년 전 야유회를 이야기하는 등) '그래, 저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증상들 중에 누가 봐도 절반 이상은 내 이야기였다. ADHD의 증상이라고 나오는 숏츠들의 내용을 보면 대부분 사주나 타로처럼 별 것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증상들이다. 그래서 댓글을 열어보면 혈액형 성격이나 MBTI 댓글과 거의 비슷하다.
'와 이거 전부 다 내 이야기인데, 내가 ADHD였다니!'
'ㅋㅋ 지나가다가 갑자기 ADHD 된 사람'
'아니 무슨 전부다 자기가 ADHD래.'
'여러분 ADHD는 정신과 가서 진단을 받아야 하는 거예요, 이런 증상 있다고 ADHD가 아니에요.'
'여기 또 ADHD 호소인들 많네.'
보통 이 5가지 댓글이 가장 많이 달렸던 것 같다. 이 중에서 나는 3번 5번 정도의 포지션이었다.
감기의 증상을 생각해 보자. 기침, 오한, 발열 등이 있다. 일주일 전에 기침이 나고 오한과 발열을 했던 기억이 있는데 숏츠에서 코로나의 증상 3가지가 기침, 오한, 발열이라는 내용을 보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헉, 그때 그게 감기였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병원을 가서 진단을 받아보면, 감기일 수도 있지만 감기가 아닐 확률이 더 높다. 오히려 매운 음식을 먹고 장염에 걸렸을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그러므로 증상을 가지고 자신이 판단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짧은 정보에는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콜록콜록 한 번에 자신이 기침을 동반한 감기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폐와 기관지가 이미 목젖까지 올라와서 '이 정도로 저에게 무관심하다니 탈출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기침에도 "뭔 놈의 감기여,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야."라고 해버리고 만다. 병에 걸려서 진료를 받아야 하는 지경과 병이 아닌 그냥 해프닝에 가까운 증상도 짧은 정보에서는 둘 다 '기침'이 된다. 이 기준을 정확히 아는 것이 바로 의사이다. 의사가 아닌 우리는 증상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코로나 사태를 들 수 있겠다. 코로나 사태 때 우리는 옆 사람의 재채기 한 번에 마스크를 쓰윽 착용했다. 조금 오르는 열과 몸살 기운에 바로 약국으로 달려가서 키트를 샀다. 면봉에 피가 나올 때까지 쑤셔댔지만 결국 음성 판정을 받는다. 그것도 믿지 못해 다른 브랜드 키트로 다시 검사를 해본다. "분명 코로나 증상이랑 같은 데 왜 나는 아니라고 뜨지? 그럼.. 나는 지금 뭐에 걸린 거지?"
물론 증상은 맞다. 짧은 정보에서 오한과 기침, 숨 쉬기 힘듦, 열까지 하지만 그 증상의 강도가 다르다. 어렸을 때부터 신종플루부터 코로나까지 모든 전염병 얼리어답터였던 나는 그 증상의 강도 차이를 안다. 이건 감기, 이건 전염병. 오히려 이런 큰 전염병은 발현되기 직전에는 크게 아프지 않다. 하지만 그 맛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증상의 맛이 다르다. 일반 감기가 인스턴트 편의점 느낌이라면 이름 있는 전염병의 경우 우아한 레스토랑의 느낌이다. 부드럽게 물어본다. 애피타이저를 내려놓으며 '이제 곧 코스가 시작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느낌이다. 물론 메인요리는 굉장히 격정적이다. 시작하자마자 빠르게 아프고 후유증 없이 끝나는 삼각김밥 같은 편의점과 달리 이런 전염병들은 후식까지 챙겨준다.
이런 증상의 강도 차이를 짧은 정보에서는 전달하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병들의 증상에 대해 알려주는 영상들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 살면서 물건을 안 잃어버려봤던 사람은 없다. 아직 한 번도 없다면 아직 삶을 오래 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물건을 잘 잃어버린다면, 핸드폰을 어디다 뒀는지 자꾸 찾는다면, 즉, 건망증이 심하다면 ADHD일 수도 있다!라는 이야기는 틀린 말이 아니지만 건망증이 심한 걸 보니 난 ADHD였네 하는 것은 틀린 말이 된다. 다리가 4개면 강아지일 수도 있다!라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리가 4인걸 보니 강아지네~ 하는 것은 틀리다는 뜻이다.
그래서 너무 보편적인 ADHD들의 증상을 보면서 '아니, 한국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다 이런 것 아니야? 효율을 중시하고, 뭐든지 빠른 시간 내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하는 사회적 문화가 있는데, 안 그런 사람이 어딨어? 여기서 증상 보고 자기가 ADHD라는 사람들은 또 전부 끼워 맞춘 거야.'라고 한국인 특성인 '아니'를 시전하고 넘겼는데, 내가 ADHD라니! 나는 비싼 진료비와 함께 약을 받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병원을 나섰다. 그렇게 실눈을 뜨며 의사를 믿지 못한 나는 별 수 없지만 내가 ADHD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날 받은 약봉지를 바로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약을 몇 번 먹던 나는 끝까지 진료를 받진 않았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약값과 진료비가 너무 비쌌다. 몇 십만 원씩 내면서 치료를 받을 값어치가 있나? 싶었다. 두 번째는 약의 효능이었다. 몇 가지 후기를 찾아보니 자신에게 맞는 약을 찾아가는 과정이 꽤나 길다고 하는데, 나는 약을 먹어봐도 일상생활에 별 다른 차이를 못 느꼈고, 용량을 늘리니 잠이 쏟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3일 밤새고 자다 깨서 물 마시러 가다가 쓰러지는 것처럼 잠을 자게 됐다. 안 그래도 밤에 못 자고 못 일어나는데 오히려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다고 느껴졌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무기력증 때문에 간 것이었는데 약 핑계로 더 아무것도 안 하게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문제였다.
마지막으로는 병원에 대한 불신이다. 아직 내가 다른 곳들을 다녀보지 않았고, 확증편향이 심한 사람으로서 이는 잘못된 이야기인 줄은 알지만, 아직은 내 생각이 너무 강해서 내 의견과 맞지 않는 병원의 의견이 내게 깊게 생각해주지 않는다고 느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내면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들은 제외하고 상담이 진행되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는 내가 언제나 그러면 그런가 보다고 생각하지 않고 끝없이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들기 때문일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단순한 아집일 수 있지만 아직 나는 이런 부분에서 어리다고 느낀다. 큰맘 먹고 정신과를 가면서 기대했던 것들과는 조금 달라서 나는 치료를 받지 않았지만 꽤나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한번 가볼 의향은 있다. 내 생각에는 그때도 ADHD 때문에 치료하고 싶어서 간다기보다 궁금해서 가볼 것 같다. 실제로 길게 치료를 받게 되면 어떻게 사람이 변하는지 실험을 해보고도 싶고, 지금의 나와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알고 싶다.
그래서 결국 ADHD라서 나는 내 삶이 불편했는가?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 ADHD인지도 몰랐고 불편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래서 이다음 편에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진단을 받고 많이 찾아봤는데, 나는 증상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불편했던 모든 상황을 나만의 규칙을 만들어가며 해결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이 살았던 것이었다. 공신력도 없고,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적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