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차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 기업
뮤지컬이나 연극등에서 마지막 공연 일정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시작되는 것을 오픈런(open run)이라 한다. 무대의 대관일정에 맞추어 공연 회차가 정해진, 즉 일정의 시작과 끝이 있는 리미티드 런(limited run)과 반대 개념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오픈런이란 용어가 다른 의미로서 더 많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한정된 수량의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개장 시간에 맞추어 고객들이 경쟁하듯 달려가는 모습을 빗대 오픈런이라고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확히 같은 스펠링을 가진 단어의 조합이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게 쓰였다. 이러한 현상이 잦아지자 의미는 확장되어 이제 몰려든 사람들이 매장 앞에 길게 줄을 늘어서는 모습까지 포괄하여 불리고 있다. 주로 고가 상품들에서 이런 현상이 많이 벌어지는 덕분에 실 구매구객을 대신하여 줄을 서는 구매대행 파트타입 잡이 생겨났을 정도다.
생산능력 과잉으로 팔기 위한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지는 반면 어디선가에는 사람들이 서로 사기 위해 줄을 선다. 이런 상황이 연출되는 배경에는 자극된 수요와 한정된 공급이라는 요소가 자리 잡고 있다. 통상 공급자는 수요가 늘어나면 재빨리 공급을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하기 마련이지만, 특정 브랜드들은 반대의 전략을 펼치기도 한다. 수요는 계속적으로 자극하면서 공급을 의도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롤렉스나 샤넬 같은 일부 명품브랜드들은 이러한 전략을 잘 쓰기로 유명한데 그래서 한 참 인기가 많을 때 이들 매장에 가서 찾을 수 있는 건 '직원과 공기뿐이다'라는 농담까지 유행했다.
돈을 싸들고 줄을 서봐도 원하는 것을 가질 수가 없으니 더 가지고 싶어 열망을 한다. 소위 잘 나가는 브랜드가 자신들 제품의 가치를 높이는 동시에 소비자들을 길들이는 방식이다. 수요는 거시적인 경제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하지만, 시장에 뜨겁고 돈이 많이 풀렸다고 해서 모든 것에 대한 수요가 다 오르는 것은 아니고, 시장이 침체되었다고 모든 수요가 다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내재 가치와 무관하게 가격이 솟구치기 쉬운 것들은 의도적이던 태생적이던 공급이 제한된 상품들이다. 명품 브랜드의 인기 모델뿐 아니라 강남 부동산, 코인열풍 등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반복적으로 보아왔다.
의도적으로 공급을 조절하는 브랜드들의 전략은 리셀마켓이라 불리는 중고 거래 시장이 급성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기 모델은 출고가 보다 수배에서 수십 배의 가격으로 재판매가 성사되기도 하는데 이는 상품의 소장가치를 높여 다시 매장 앞에 줄을 설 동기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재판매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대이익이 커지면 처음부터 판매를 목적으로 상품을 구매하는 이들이 생겨난다. 활황기에는 개인의 소소한 재테크 수단을 넘어 사업으로까지 발전하기도 한다.
이는 단지 명품 브랜드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나이키는 대기수요를 관리하며 한정판 신발을 구매 희망 신청자들에게 추첨 방식으로 판매하기도 하고, 누적된 사업 부진으로 LG가 모바일폰 사업을 포기하자 마지막 출시 모델의 거래 호가가 급격히 오르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일시적 현상이라 하더라도 경쟁력을 잃고 시장에서 사라지는 상품조차도 공급 중단의 신호가 뜨자 갑자기 가치가 오르는 웃지 못할 현상까지 벌어지는 것이다.
시장 전체를 보면 여전히 공급이 넘처나는 시대이고, 상품의 기능적 측면으로만 본다면 대체재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꼭 특정 제품을 가지고 싶다는 구체적 욕망이 있기에 가치가 오르며 이는 브랜드가 가진 힘으로부터 나온다.
쇼핑몰 전면 매대에 한 켤레 만원, 이만 원의 가격표를 붙여놓고 할인 판매하는 신발들이 잔뜩 쌓여 있어도 사람들은 무심코 지나쳐 버리고, 수십만 원짜리 운동화는 입고가 되기 무섭게 팔려나가는 현상은 제조 기술의 상향 평준화로 기능보다, 감성, 디자인, 상징 같은 것들이 중요해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이테크에서 하이터치의 시대로 넘어왔음이 더욱 선명해졌다. 까닭에 브랜드는 기업의 핵심적인 무형자산이 되었다. 소유한 브랜드의 가치는 영업이익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소위 이름값이 상품의 부가가치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브랜드 파워는 광범위하게 작용되며 주택시장에 까지 침투했다. 부동산은 말 그대로 움직일 수 없는 재화이기에 입지가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지만, 동일 지역 동일 구조의 표준화된 아파트라 하더라도 어떤 이름의 간판이 붙어 있느냐에 따라서 시세가 달라지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유명 아파트 브랜드와 지역을 상징하는 이름이 조합된 '단지명'만 있으면 주소 없이도 어디인지 알 수 있을 정도다. 이런 대단지 브랜드 아파트들은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주거지 중에 하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투영하는 역할까지도 하고 있다. 업종을 불문하고 잘 나가는 브랜드를 갖춘 재화와 그렇지 못한 재화 간의 격차가 더욱 크게 벌어지고 있음을 체감하는 시대이다.
불황기 소비패턴의 변화
소비자의 패턴도 변했다. 경기는 늘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며 성장에 왔기에 우리는 과거의 흐름 속에서 일정한 규칙을 발견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불황에는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가까운 여행, 오락, 패션 같은 재량재 Consumer discretionary의 소비를 줄이고 식음료, 교육, 통신 같은 필수재 Consumer staples의 소비 비중이 늘어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굳이 통계를 찾아보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유추할 수 있고 의심 없이 받아들여질 만 결과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급속도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경기가 좋지 않아 수요 전체가 감소되는 추세에서도 명품, 고급차량, 레저 등 사치재에 가까운 것들이 오히려 호황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빈부의 격차가 확대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성장이다. 원인은 크게 두 가지 요인으로 함축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동조현상이다. 불황기에 명품과 같은 사치재 판매가 호황을 누리는 현상은 스마트폰이 급속도로 보급되고 보편화되는 시기와 겹치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부자들이 SNS를 통해 부를 과시하면 이를 모방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애초에 자신과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고 여겨지는 유명인이나 일부 상류층이 아닌,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둘씩 모방소비에 동참하는 것을 지켜보면 왠지 모를 소외감이 들기 시작한다. 이를 극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자신도 그 소비행렬에 동참하는 것이다. 물리적인 제약이나 경계 없이 언제라도 나와 상관없던 타인의 삶을 훔쳐보고, 불특정 다수에게 내가 가진 것을 뽐낼 수 있게 해 준 SNS는 서로가 서로를 보며 모방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둘째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 상실이다. 커져가는 빈부의 격차를 느끼고, 아무리 애쓰고 착실히 모아봐도 집 한 채 가지기 힘든 현실을 살아내며, 미래를 위한 준비 보다 오늘의 즐거움을 택하는 젊은 층들이 많아졌다. 희망이 없어진 현실 속에서 느끼는 억압이나 스트레스를 고가의 제품 소비로 풀기도 한다. 덕분에 명품의 소비 연령층도 점점 낮아지고 있는 추세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 상실은 장기적인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생존에 대한 위협이 증가하면 대중은 즉각적인 만족감을 추구하게 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실제 미국에서 9.11 테러가 발생했을 당시 전체 소비가 얼어붙는 와중에도 고급 차량이나 시계, 귀금속 등 명품 산업 매출은 오히려 반등했었다고 한다.
소득은 늘지 않는데 사치품 소비를 늘리려고 하니, 평소에는 가성비를 추구하는 경향이 동시에 나타나게 된다.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백화점 명품관에서 쇼핑을 즐기는 사람과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이 동일한 소비자가 된 시대이다.
최저가 경쟁이 계속되고 저렴한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다이소는 조 단위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인기가 높아지는 한편, 최고급 수입차 구매행렬은 계속된다. 그야말로 소비의 양극화 시대이다. 소비 양극화는, 양끝을 추구하는 성공적인 브랜드들과 연관 기업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중간 지대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기업들 간의 실적과 전망까지 갈라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