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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빌 언덕 Nov 08. 2020

상담에 깃들어 있는 것들

상담 이론 이야기

많은 상담 이론이 있지만 칼 로저스의 내담자 중심 상담이론은 상담이론과 기법의 기본으로 여겨집니다. 상담이라고 할 때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공감', '경청', '수용' 등의 너무나 친숙한 단어들이 바로 내담자 중심 상담이론에서 나오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내담자 중심 상담이론이 나오기 전에는 상담에서 '공감'이라는 게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되지도 않았던 시절도 있다는 것이지요.


내담자 중심 상담이론의 붐은 확실히 끝났지만, 오히려 다른 많은 상담이론 속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내담자 중심 상담이론이 '잘 고안된' 기법들의 묶음이 아니라, 상담 외의 영역에서도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철학'과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내담자 중심 상담이론은 참 특별합니다. 내담자 중심 이론은 이론을 넘어 '철학'과 '관점',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 많은 일깨움을 주고 있습니다. 상담가로서 일하면서 힘이 들거나 소진되거나 길을 몰라 방황할 때, 혹은 미련할 실수를 할 때에 조차도 내가 어떤 상담가인가를 돌아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제 브런치 글을 잔잔히 보신 분이라면 느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게 상담자란 내담자보다 뛰어나서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담자와 실시간으로 함께 성장해 나가는 사람이며, 내담자가 본연의 힘과 욕구를 더 펼쳐 나갈 수 있도록 기꺼이 바닥과 텃밭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런 상담자 모델은 내담자에게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은 상담자 본인의 마음을 먼저 더 따뜻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상담 이론들 중에서 내담자 중심 상담이론이 가장 효과적인 상담이론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상담자가 제일 행복한 상담이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담자 중심 상담이론의 가장 큰 장점은 상담 과정과 일상의 '일치성'이며, 그렇기에 상담 종결 후 내담자가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그 일상의 다양한 측면에 가장 자연스럽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유명하다는 상담의 대가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고서도 막상 상담이 끝난 후 자신의 삶으로 돌아왔을 때에 배웠던 것들이 하나도 적용되지 않고, 그래서 다시 또 그 대가를 오랜 기간 쫓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상담자가 진단에 맞는 기법만 전수해주고, 내담자 자체가 성장하지 못한다면 다른 문제들이 생길 때마다 또 그 대가를 찾아가야만 합니다. 반면 내담자 중심 상담이론에 등장하는 상담자는 '외상 잘해주는 동네 슈퍼 아저씨'같고, '같이 흉 잘 봐주는 미용실 아줌마'같기 때문에 내담자가 현실에 돌아가서도 멀리 있는 상담자를 그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내담자의 주변 사람들에게서 상담자와 같은 선량함과 따뜻함을 발견해낼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질 뿐입니다.


요가나 명상, 혹은 그에 기반한 상담 이론들도 내담자의 자발성이나 성장을 다루기 때문에 과정이 자연스럽고 편하게 받아들여지는 장점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내담자 중심은 혼자만의 수련이 아닌 철저히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복잡한 관계로 이루어진 현실판에서 적용을 하기 더 좋은 면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사람들을 떠나 홀로 걷는 명상 같은 여행을 하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


많은 상담이론들은 의외로 내담자보다 상담자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양한 기법으로 무장한 최신 상담 이론일수록 내담자가 자신의 고민을 위로받고 치료받기 위해서는 마치 학교의 학생처럼 공부부터 잔뜩 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호흡법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법도 배워야 하고, 심지어 감정을 다루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저에게는 그런 수많은 ~하는 법들이 너무 억지스럽고, 과장되어 보이며,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져 보이기도 합니다.


'웃음치료'라는 것이 처음 나왔을 때  TV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로 하하하 하며 억지웃음소리를 내는 것을 봤을 때 정말 코디미스러웠는데, 이제 그러한 프로그램은 요양병원, 복지관 등을 필두로 수많은 곳에서 황당하게 쓰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슬플 때 억지로라도 좀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하거나 일부러라도 웃긴 영화를 본다던지 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잠시 멈추거나 피로를 푸는 것에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으나 그렇게 감정에 대해 억지스럽게 수작을 부리다가 나중에 얼마나 더 큰 탈이 나거나 감정과 인격이 일치하지 않는 가면 쓴 사람이 되는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감정을 '교정'하려는 것만큼 무식하고 위험한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감정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저는 수많은 부정적인 감정을 문제 증상으로 규정하고, 치료해서 없애려고만 하는 모든 치료 이론들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부정적인 감정, 치료해야  될 감정이란 정의는 누가 내리는 것일까요? 이것은 철학과도 관계된 이야기입니다. 일전에 슈퍼밴드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윤종신 씨가 "나는 인생은 기본적으로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사람들은 그 속에서 최대한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의 가치관은 언뜻 인생을 회의적이고 비관적으로 보는 관점 같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부정적인 경험이나 감정을 기꺼이 우리 가까이 사는 친구로서 인정하는 듯한 느낌을 먼저 받습니다.


저는 내담자가 아무리 비극적이고 슬픈 감정을 내보여도, 오래고 깊은 우울을 꺼내도 그것을 매우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떨쳐내라고 독촉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치료할 것인지 말 것인지 역시 모두 각각의 내담자들이 결정할 일들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인생을 스스로 살고 있는 한 말입니다. '좋은 생각을 해야 행복해진다'라는 말을 저는 아주 싫어합니다. 저는 '행복은 모든 감정 속에 깃들어있다'라고 믿습니다. 실제로 만나는 많은 내담자들을 통한 경험에서도 긍정적인 사람보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더 깊은 행복함을 느끼고, 더 많은 사람들과 깊은 유대감을 나눈다는 것은 충분히 경험하는 일입니다.


내담자 중심 상담 이론에 깊이 담여 있는 '인간에 대한 따뜻하고 존경 어린 시선, 그리고 신뢰'를 저는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은 무엇에 비교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너무나 의미 있고, 가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 놓고 보면 이것은 과연 '상담 이론'에 국한되는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우리 인류가 함께 지향해볼 정도의 가치가 있는 철학이자 선언은 아닐까요? 상담의 범주를 벗어나도 인류 문명과 함께 해온 모든 종교, 철학, 문화예술, 사회제도에서도 이와 같은 사상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래 있던 개념과 철학이 상담의 옷을 입고, 상담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상담이론은 인간론에 대한 깊은 고민을 담고 있어야 하고, 그래야 나 개인의 치료에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연합과 함께 성장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박증 환자에만 유용한 치료 이론은 인류의 고민을 아우를 수 없습니다. 아픈 사람에게도 유용하지만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도 유용한 상담 이론이라야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이 함께 손잡고 사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담 이론은 삶의 이론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선호하는 하나의 이론을 자기 길로 삼아 연마 중인 대가와 거리가 먼 초급 상담자이며, 학교와 수련을 통해 배운, 보편적으로 검증된 상담이론을 두루 사용하는 평균적인 상담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내담자 중심 상담이론이 가진 가치를 계속 중요하게 느끼는 것처럼, 세상의 많은 내담자와 상담자,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 상담 이론이 던지는 관점을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사진-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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