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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글쓴이 Oct 19. 2021

집 도면

내 삶의 또 다른 자화상

1. 

 최근 우리 가족은 집단 거주의 상징 '아파트' 생활을 정리하고 수도권 모처의 단독주택으로 이사했다. 주된 이유는 '함께 사는 강아지들의 수가 많아지다 보니 아파트에서 살기 힘들다' 였는데, 막상 살아보니 힐링받는 건 개보다는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요즘 머릿속에 꽉 차 있다. 살아생전 처음 살아보는 단독주택이지만, 어쩐지 이제야 내 집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뭘까.  


2. 

 어렸을 적엔 그렇게 좋은 집에 거주하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정말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성인이 되어 직장을 잡은 내가 집을 알아본다면 절대 거들떠보지 않을 집. 엘리베이터 유무를 논하는 건 너무나 사치스럽고, '거실'과 '소파'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아파트 사는 다른 사람들의 집을 가보고 나서야 알게 된 나의 거주 공간. 그 조차도 엄마가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마련했다는 걸 알기에 받기만 하는 나는 불평조차 할 수 없는 그곳. 

 나는 그 집에서 냉장고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창고 방에 책상 비슷한 것을 놓고 밤새워 공부를 했었다. 거기서 전교 다섯 손가락도 들어보고, 서울로 유학도 가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교도 진학했더랬다. 내가 살던 동네는 너무 낡아버려 최근 몇 년간 대대적인 재개발이 들어갔는데, 그 와중에 우리 집이'였'던 그 건물은 고칠 수도 없는 땅에 지어져 여전히 누군가의 거주지로 남아있다. 


3. 

 '취미'의 개념이 생기고부터 내가 탐닉했던 행위는 건축도면을 수집하고 공부하는 것이었다. 상업 건물은 아니고, 주로 아파트나 해외의 전원주택 같은 주거용 건물이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좋은 집, 아니 최소한 누구라도 당당하게 초대할 수 있는 집에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벼룩시장 종이신문에 빌라 평면도가 올랐던 시절이 있던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시절부터 인터넷 검색으로 넘어오는 과정을 거쳐 다양한 도면을 마주했다. 겨우 초등학생 3-4학년이 전문지식이 있었을 리는 없고, 정말 많은 양을 봐오며 이건 뭐구나, 이건 이렇겠구나 하며 상상의 나래를 조용하고 외로이 키웠다. 그런 평면도에 붙어있던 가격을 보며 어렴풋이 부동산의 가격 측정에 대한 대한 개념은 자연스레 잡혔고, 우리나라 여러 동네에 대한 관심은 덤으로 키워졌다. 공대였다면 건축학과를 갔을 텐데 안타깝게도 타고난 문과라 끝까지 취미로만 남았다. 


4. 

 코로나 시대가 접어들며, 사람들이 전보다 '집 안에서 잘 사는 것'에 관심이 많아졌다.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는데, 덕분에 끊었던 TV시정을 가열차게 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나처럼 집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방송가에도 몇 있었던 것인지, 내가 그동안 부족하게 느꼈던 몇몇 부분들을 시원하게 TV에서 긁어주는 것이 아닌가. 관심 없던 유튜브도 이 덕분에 재미가 붙었다. 

 마침 우리 가족은 사정상 신도시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왔다가 코로나로 인한 이웃들의 연이은 리모델링에 '도저히 아파트에선 못 살겠다'라고 백기를 들게 되면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야 하는 미션이 생겼는데, 그동안 취미 생활로 쌓아온 나의 기존 지식들에 각종 매체에서 주는 정보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판이 깔리게 되었다. 

 아파트를 사겠다고 하면 사실 대충 동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후 오지선다형처럼 몇 개의 잔여 매물 중 하나를 선택을 하면 그만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꽤나 조건이 까다로웠기 때문에(일단 아파트는 빼야 함) 나는 지난 수십 년간 취미를 실습으로 끝내지 못한 한을 풀듯이 수도권을 이 잡듯 뒤지며 다양한 형태의 매물을 찾아다녔고, 결국 최고의 위치의 최상의 매물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5. 

 원하는 물건을 발견해서 계약하기까지 엄청난 희열에 하루하루 이사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지도 앱의 거리뷰에 나오는 모습만 봐도 뿌듯하다. 

 우리 가족이 직접 지은 집은 아니지만, 짓는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따스한 외관과 시원하고 효율적인 구조를 가진 집. 건물도 건물이지만, 도시가스도 들어오고, 전철도 있고, 태양열도 설치되어있고, 편의점도 도보 3분인 동네이니 얼마나 대박인가. 이 집을 찾기 위해 몇 개월간 단독주택 지식을 쌓고, 유튜브를 보고, 온갖 부동산 관련 사이트를 다 뒤졌다. 

 기나긴 취미의 정점을 찍었다는 생각에 더 이상의 집이 눈에 차지 않을 정도이다. 평생의 거처를 구했단 생각에 가족들도 정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강아지들은 매일 30분씩 신나게 마당을 뛰어다니며 볕을 쬔다. 엄마는 주말이면 베란다에서만 작게 했던 화분 키우기를 마당 가득 채워놓는다. 내가 바라 왔던 진짜 집이다. 


6.

 나의 취미는 철저히 실거주를 방향성으로 삼았기 때문에, 누군가는 우리 가족의 거처가 ' 단독주택이라니, 투자가치로는 영 꽝이네요'라고 평가받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집에 관한 기나긴 여정을 한 사이클 마치며 든 생각은 '집은 내가 돈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나를 만드는 곳이구나'라는 것이다. 

 매번 평면도를 보면서도 해왔던 상상은 '이 방에선 뭘 해야지, 거실에는 뭐가 있었으면 좋겠다' 같은 나의 삶의 스냅샷이였지, 몇 배로 가치가 오를까는 아니었다. 투자를 목적으로 했다면 이 돈을 들고 서울이나 대도시 역세권 구축이라도 집을 사서 들어가야겠지만, 나와 사람가족과 강아지가족은 최소 몇 년간 돈이 오르길 기다리며 맘껏 짖지도 못하는 민폐의 삶을 살아야겠지. 행복이 날아가는 시간들이지 않을까, 그런 곳에서 4베이가 무슨 소용이야.

 나는 사실 직장 때문에 가족들과 따로 살고 있는지라 직장 근처에 혼자 거주할 작은 아파트를 몇 년 전에 구했는데,  나이가 들어 덜 치열하게 살아도 괜찮은 여유가 생기면 결혼 여부에 상관없이 조용한 곳에 단독주택을 구해 살고 싶다. (최근에는 한옥이나 농가 개조에 관심이 많다)  그곳에는 분명 내가 아직 찾지 못한 꿈의 도면이 있으리라 믿는다. 취미도 하고, 조용히 잠도 자고, 좋아하는 노래와 향기를 남 눈치 안 보고 가득 채울 수 있는 그런 공간의 그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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