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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remy Mar 23. 2021

[7] 정치인이나 연예인도 아닌데 지하철표가 얼마인가요

1만 원 인출하기가 왜 이렇게도 어렵기만 한지

Part 3.


친구는 고맙게도 지하철역 근처에 날 가지런히 내려주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고생했어." 뭐가 고생했다는 거지? 여기까지 데려다주느라 고생은 네가 한 거 같은데. 이러한 생각이 머릿속을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아, 그러고 보니 경기에 이긴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군, 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고생했어' 한마디가 왠지 머리를 정성스레 깎아주셔놓고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만 있던 나에게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치는 미용실 원장님의 미용 멘트 같았다. 시원하게 머리를 감겨주셔서 두뇌 회전이 더욱 빨라져 기분 좋은 건 나인데 역시나 머리를 털어주며 한마디 덧붙이시는 원장님, "수고하셨습니다." 드라이까지 해주시고 나로서는 도무지 창조해내지 못하는 힙한 헤어스타일까지 만들어주셨는데 역시나 한마디 거드시는 원장님의 "수고하셨습니다"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미 차는 떠났다. 빠르기도 하여라. 손을 흔들어줄 찰나조차 없었다. 어딜 저리도 급히도 달려가는지... 지하철역에는 나 혼자 남겨졌다. 내리막길이라 다행이라 생각했던 108번뇌 같은 계단의 숫자를 꼭꼭 세어가며 룰루랄라 내려갔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지하철표 자판기를 발견했다. 예전에는 벽 쪽에 줄을 서 있던 자판기, 이제는 개찰구 근처에 두 대만 덜렁 남겨져 있었다. 그런데 옛적 그 모습이 아니다. 심지어 한 대는 고장이 나 있었다. 너무나도 어색하게 대면한 지하철표 자판기. 티켓 보증금 500원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평소 사용하던 후불교통카드 덕에 대충의 요금은 알고 있었기에 티켓 보증금 포함하면 1,900원 또는 2,000원일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정말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정말 아니었다. 이때부터 또 멘탈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내게는 단지 현금 2,000원이 들려 있었다. 150원이 부족했던 것이다. 단지 그 150원.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선 지하철역 바닥을 훑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왜 그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요즘 현금 들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동전이 떨어져 있을 거라 생각은 왜 했을까. 혹시라도 100원은 몰라도 150원이라는 어중간한 숫자의 동전 말이다. 진짜 한 5분을 둘러보았던 것 같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귀신에 홀렸던 것일까. 정신을 차려보니 역시나 동전은 바닥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친구에게 전화해서 돌아오라고 애걸복걸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떠나버렸겠지. 이 역시나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위기탈출법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도저히 묘수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포기하려던 그 순간 현금인출카드가 생각났다. '맞다, 그 카드는 있었지.'


지하철역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108번뇌 계단을 이제는 역으로 올라가야 한다. 기절하는 줄 알았다. 정신도 없는데 육체마저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지상으로 올라와 은행을 찾으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얄밉게도 편의점 ATM기가 보였다. 수수료가 무려 1,300원인가 한다고 적혀 있었다. 정말 '무려'라는 단어가 입안에서 쉴새없이 맴돌았다. 150원이 부족할 뿐인데 1,300원을 쓸 수는 없었다. 고전경제학이든, 행동경제학이든 상관없이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는 너무 쓸데없는 낭비인 것만 같았다. 바로 옆에 ATM기가 있었지만 그렇게 건너뛰고서 은행을 찾아다녔다. 평소에 그렇게 길거리 돌아다니면 발에 걸리는 것 같은 은행들이 왜 하필이면 머피의 법칙처럼 오늘은 이렇게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인지. '에라이, 내 팔자야.'


골목도 누비고 다녔다. 어랏. 목 마른데 커피나 한잔 사서 마실까. 수수료 1,300원은 아까웠는데 4,500원짜리 어쩌고 저쩌고 블렌디드 커피는 왜 아깝지가 않았던 것일까. 내기 경기에서 승리를 거머쥔 나에게 선물을 해야 했던 것일까. 이 역시나 고전경제학이든, 행동경제학이든 경제학의 관점에서 제대로 짚어보면 말도 안 되는 충동소비임에 분명하다. 자, 계속해서 아침에 후불교통카드를 챙기지 못해 낭비되는 소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결국 10분을 헤매다가 커피를 홀짝거리며, 경기에 이긴 나를 칭찬하며, 후불교통카드를 챙기지 못한 나를 동시에 비난하며 1만 원을 인출했다. 정말 오랜만에 현금을 손에 쥐었다. 꽤나 낯설었다. 그런데 이 1만 원 인출하고자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성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세상은 요지경이라더니 이날이 나의 요지경 데이일 줄이야. 


다시금 108번뇌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커피는 이미 다 마셨고 커피잔은 이미 쓰레기통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시금 지하철표 자판기 앞에 섰다. 1만 원 권을 넣었다. 2,150원을 제외한 잔돈이 와르륵 쏟아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동전은 집에 저금통에 모아두는데 7,000원+2,000원은 뭐 하는 데 쓰지? 이런 생각이 또 문득 들었다. 현금을 갖고 있는 것 자체도 신경 쓰이는 일이었던 것이다. 현금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습관화 되어 있는데 현금을 갖게 되는 상황이 생기다보니 어떻게 이 돈을 사용해야 할까 고민이 들었다. 


지하철표는 샀겠다,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음료수 자판기가 보였다. 신기하게도 이 자판기 역시나 카드를 거부하고 있었다. 지상의 경제는 디지털 세상이라 현금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곳 지하 경제는 여전히 아날로그 세상이라 현금만 달라고 한다. 역시나 아이러니하다. 1,600원짜리 음료수를 샀다. 이제는 계획되지 않은 무계획 소비를 마구하고 있는 나를 탓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지폐와 현금을 들고 있는 것 자체가 귀찮아서 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1,600원짜리 음료수는 지금껏 나의 행동을 충분히 보상해주는 특수 아이템이라는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단숨에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지하철만 타면 된다. 아니다, 내려야 할 역에서 내려서 지하철 티켓 반환 보증료인가 뭔가 하는 500원도 받아야 한다. 


아, 지하철 타는 것이 왜 이렇게나 힘들지. 선거철마다 지하철이나 버스 요금 맞추기 경쟁을 벌이는 정치인들을 그렇게나 비웃었는데 내가 이런 유사 실수를 현실로 맞닥들이고 있었다. 예능에서 연예인들이 지하철표 구입하는 모습을 촬영하는데 역시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 매는 그들을 한없이 비웃었는데 나 또한 도찐개찐이었다. 해본 적이 없으니 몰랐던 것이다. 다음번에 그들의 모습을 TV에서 만난다면 마음속으로 파이팅이라도 외쳐줘야겠다. 제발 성공하라고, 실패하지 말고 성공해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으라고.


루틴을 이탈해 온갖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고 계획에 없던 이상한 소비에 이르렀던 하루의 끝은 생각보다 차분하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새로 산 휴대폰 케이스는 갖다버리고 다시 원래 사용하던 낡아빠진 케이스를 꺼내들었다. 역시나 구관이 명관이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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