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나 집이 많은데 내 집은 어디에 있나요?
'나의 길은 오직 나만의 것입니다'라는 불효의 말조차 남기지 못하고 도망치듯 가출해버린 이 시대 최고의 불효자가 나 아닌가 싶다가도 생각보다 덤덤하게 반응하신 부모님의 리액션을 생각하면 감사해야 할지, 오히려 서운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그 말을 하기에 앞서 '네 인생은 네 것이니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라고 이미 말씀하셨던 적이 있었던 바, 이러한 고민 자체가 의미없는 것일 수도 있겠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말씀해주실 때만 해도 피 끓는 젊은 청춘에게 큰힘이 되는 격려의 말이라 생각했다. 우리 부모님은 역시나 깨어 있는 분, 따봉이라는 생각에까지 가 닿아 있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때 나를 강제로 방에 가둬두면서 우리나라 막장드라마의 현실 버전을 보여주셨다면 지금의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곤 한다. 그 옛날 옛적 개그맨 이휘재가 "그래 결심했어"라 외치며 두 가지 삶을 살아가던 <인생극장>처럼 반대편으로 계속 이어졌을 내 삶은 어땠을까. 착한 아들로서 부모님을 잘 모시고 좋은 사람과 결혼해 아들딸 잘 낳고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버전처럼 'happily ever after'를 할 수 있었을까. 물론 알 수는 없겠지. 그때로 결코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곁에 오래 두고 싶은 온실 속 화초 같은 착한 아들의 삶을 과감히 버리고 들꽃처럼 거침없는 아들의 삶을 살기로 했으니 나의 인생은 그렇게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는 서울로 가야만 했다. 뮤지컬 배우를 하고 싶은데 당연히 서울로 가야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당장 어디서 살지가 가장 큰 문제였다. 현대판 닭장과 같다는 창문 하나 없는 고시원의 삶은 꿈도 꾸기 싫었다. 그렇다고 부모님의 지원 없이 원룸이라도 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도 없었다. 내 뜻대로 살겠다 했으니 내 뜻대로 살아야 했다. 정말 그렇게 해야 했던 것이다.
이리저리 고민했다. 아, 나의 외국인 친구가 서울에 있었지. 부산에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서울에 일자리를 찾아 떠난지 좀 되었는데 갑자기 생각났던 것이다. 하우스메이트로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어릴 적부터 speaking 공부를 많이 해두었던 효과가 이런 데서 힘을 발휘할 줄이야. 친구는 선뜻 오케이를 해주었다. 한 달에 얼마 정도의 rental fee를 내기로 했다. 방 3개의 단독 주택 집에서 혼자 살아가던 친구는 문간방을 하나 사용하도록 해주었다. 뭔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느낌이 드는 그런 사랑방 같은 문간방의 느낌이었다. 시대는 많이 바뀌었지만 굳이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침대가 하나, 책상이 하나, 그렇게 단촐한 방이 서울 하늘 아래 수많은 집들 중에 나의 집이었다. 다행히 창문이 있었다. 창문 너머로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고 바로 대문이 보였다. 대충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봤음직한 그런 집이었다.
나는 이곳이 좋았다. 힘들게 뮤지컬 오디션을 보느라 서울 곳곳을 누벼야 했는데 버스 타는 것이 무서워서 빙 돌아가더라도 지하철만 탔던 그때. 그래도 힘든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 몸 하나 누일 수 있는 곳이 사람 사는 집같이는 느껴졌으니 말이다. 햇볕이 쉬이 드나들고 달빛이 몰래 찾아드는 그런 방이었던 것이다. 폭신폭신한 침대도 있었다. 괜히 집주인인 친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지만 나 스스로 눈치를 보며 적당히 먹는 눈칫밥도 이유없이 배부르게 하는 데는 효과가 있었다. 집에서 편하게 지내라며 'make yourself at home'이라 말해주었지만 한국 음식을 먹지 못하는 불편함은 어쩔 수 없었다. 부엌에서 김치 한 뭉텅이 꺼내들고 요리라도 할라치면 친구가 Oh My God을 외칠까 봐 신경이 쓰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태원에는 한국 음식을 먹을 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세계음식문화축제까지 열리는 곳이라 했는데 한국 음식은 세계 음식이 아닌 것인지 왜 이렇게 찾기가 어렵단 말인가. 당시에는 저기 골목골목을 뒤져가다보면 삼겹살집이 한 군데 있었는데 삼겹살 혼자먹기 신공이 몰아치던 때도 아니고, 한국 음식 먹고 싶다고 삼겹살만 구워가며 비싼 돈을 쓸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한국 음식을 파는 곳은 어디 있단 말인가.
결국 한 군데 찾아냈다. 기사식당을 겸하던 김치찌개집이 6호선 녹사평역을 지나 지금의 경리단길을 가는 길목에 있었다. 그 집은 김치찌개만 파는 집이었다. 버스는 노선을 전혀 몰라서 타기가 무서웠고, 지하철을 탈라치면 역시나 지하철 표값도 아까워서 벌벌 떨던 때라 오디션이 없거나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을 때는 집에만 있었고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거기 김치찌개집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야 했다. 밥은 처음부터 고봉밥을 주셨던가 아니면 알아서 더 퍼 먹으면 되는 시스템이었나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참 많이 먹을 수 있긴 했다. 김치찌개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으니 한 끼 먹고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김치찌개라는 추억이 더욱 짙게 피어오르던 이태원 낮은 언덕집에서는 1년을 더부살이로 버틸 수 있었다.
아늑하기만 했던 나만의 공간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20대 후반은 충분히 가치 있었다고 확신한다. 오디션은 숱하게 떨어졌지만 마음만큼은 충분히 행복했으니까 말이다. 넓디 넓은 서울 하늘 아래 이렇게나 많은 집이 있는데 왜 내 집은 없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내 집이라 할 만한 곳은 있었으니 다행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이 집의 기운을 받아 언젠가는 오디션에 합격하겠지. 믿는 만큼 이루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