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의 정석, 청춘의 거주난민화에 대하여
집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 책들을 검색해 보았다. 참으로 예쁜 집들이 놀랍게도 예쁜 책에 비현실적으로 엣지있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저런 집에서 단 일주일만 살아보았으면...' 하는 갈증 아닌 욕망이 가슴속에 응어리지듯 똬리를 틀었다. 책속에는 예쁜 집들이 정말 많았다. 그리고 우리 모두 언젠가는 그 집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용기와 토닥임과 기대감이 책을 꼬옥 품어주고 있었다. 나를 품어줘야 고마웠을 텐데 책을 품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부처는 '우리가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라며 중생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고, 히딩크마저 '꿈은 이루어진다'라며 대한민국을 들썩였는데 정작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도 이루어낸 사람들이 없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루하루 헛된 신기루처럼 사라져가는 마음만 품고 또 품으며 다음번에는 좀 더 좋은 곳에서 살고 싶다는 다짐 아닌 다짐을 해본다.
아, 생각하기도 두렵다. 그렇다고 생각을 안 할 수도 없다. 뮤지컬 <캣츠>를 봤던 그 순간이 이처럼 후회될 때가 있었을까. 그에 앞서 <명성황후>를 관람했을 때는 왜 그러한 짜릿함과 설렘이 들지 않았던 것일까. 왜 저 무대에 내가 설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다행스럽게도 피어오르지 않았던 것일까. 세상만사는 타이밍이라고는 하지만 왜 그때 하필이면 <캣츠>를 보면서 그러한 감동과 전율이 나의 몸을 뒤흔들고서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무모함에 펌프질을 해댔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물론 알았다면 그렇게 살고자 "그래, 결심했어"라고 외치지 않았겠지. 그냥 물 흐르는 대로 공기 흘러가는 대로 세상에 순응하며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고 뽀시락뽀시락 살았을 것이다.
집에도 감히 "아버님, 어머님, 저 뮤지컬 배우 하겠습니다. 소자, 이 길로 떠나서 저의 꿈을 한번 충실하게 이루어보겠습니다"라며 외마디만 남긴 채 캐리어 끌고 출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 그냥 살 걸, 조용히 살 걸, 남들처럼 살 걸. 그런데 왜 뮤지컬 배우를 하겠다는 뜬금포 다짐이 불꽃놀이 하듯 제대로 터져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출가라 쓰고 가출이라는 것을 해버렸단 말인가.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그렇게나 쓸데없는 소리하는 아들이나 딸 자식 목아지 끌어당겨 방안에 가두어버리는 부모님들을 욕하고 경멸했는데 왜 현실에서 우리 부모님은 그렇게 해주시지 않으셨을까. 그때 그렇게 해주셨다면 지금 매일 아버지, 어머니를 한번에 다 업고 다니며 나랏님께서 동네에 효자비 세워주셨을 것이고 평생 타의 모범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여하튼 아들이 모 대학 옆 문간방, 그것도 비가 새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기고 한겨울에는 전기장판을 그나마 킬 수 있게 전기가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만한 곳에 살았던 것을 알고 계실까 모르겠다. 한 줄 설명만으로는 달동네 판자촌 느낌이 들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그것보다 조금 더 괜찮았다고 하면 거짓말일까, 아니면 오버하는 것일까.
그냥 방 하나에, 방문 열면 바로 신발을 신을 수 있는 구조. 섬돌이 마련되어 있었으니 구조상으로는 꼭 빈티지한 한옥집 같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련다. 그게 마음 편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질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일 테니. 그런데 그 하나짜리 방 옆에는 한 명 겨우 설 수 있는 부엌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분명 초대하지 않은 자그마한 동물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었다. 과연 부엌을 부엌이라 할 수 있었을까. 그곳에서 음식이라는 것을 해먹을 수 있었을까. 걔네는 도대체 어디가 나타났던 것일까. 분명 뚫린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땅에서 솟아났을까, 하늘에서 떨어졌을까. 당췌 알 수 없는 미스터리이지만 그 아이는 새벽만 되면 후다닥거리며 소리를 내고 다녔다. 부엌에는 먹을 것도 없는데 왜 그리 자꾸 나타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먼저 점거하고 있던 곳에 내가 기어들어왔으니 항의 시위를 하고 있던 것이었을까. 그렇지만 그 아이의 마음까지 헤아려줄 만큼 낭만을 품을 만한 집은 아니었다. 그냥 그곳은 살아내야 하는 곳이었다.
대학생이니 가능했겠지. 단돈 몇 천원으로 하루 이틀은 족히 견딜 수 있는 시기였기에 그렇게나 나의 꿈을 품고서 머물기에는 그리 나쁜 곳도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름 함께 지낼 수 있는 아름다운 단어, 룸메이트마저 존재했기에 더욱 버팀목이 될 수 있었다.
그곳에서의 기억은 딱 세 가지이다. 이상하게 다른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면 떠올리기 싫어서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지워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상실 같은 그런 순기능이 적절하게 작용한 것은 아닐까.
첫째, 비오는 날에 방문이자 대문인 미닫이문, 아니 요즘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슬라이딩 도어를 열면 비가 떨어지는 현장을 눈앞에서 바로 볼 수 있다는 유일한 낭만은 있었다. 부엌에 그 아이가 다니지 않는 시간을 틈타 전을 부쳐 먹기도 했다. 그리고는 막걸리를 사서 홀짝거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생각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나는 아티스트야. 예술하는 사람은 이런 고생속에서도 낭만과 열정을 잃지 말아야 해.' 낭만은 무슨 개뿔, 열정은 무슨 어휴.
둘째, 밤새 부엌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녀석이 아침 동이 틀 때쯤이면 사라진 이후 꾸역꾸역 내가 존재감을 드러낼 시간인 그 아침에 삼겹살을 구워먹었던 기억이다. 왜 그랬을까. 지금은 이유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무슨 연유에서인가 전날 삼겹살을 사다놨던 것 같은데 그걸 아침밥상 위에 떠억 하니 올려놓을 행동을 해버린 것이다. 김치라도 있었을까. 상추나 깻잎이라도 준비했던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새벽녘에 밥상 위에 올라간 노릇노릇 삼겹살 몇 점들의 소중함 정도라고 할까. 그것만으로도 왜 그리 행복했을까. 미련했던 나. 그래도 뭐, 가난하다고 낭만을 모르겠는가.
셋째, 디스크 수술 후 방안에만 누워 있던 그 몇 주간의 시간이 기억난다. 공연을 앞두고서 디스크 추간판이 터져 길에서 주저앉아 펑펑 울다가 병원에 실려갔던 이후 시술을 마치고 허리에 보조기를 채운 채 방에 누워만 있어야 했다. 차라리 본가에 들어가서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는 것이 당연했을 텐데 무슨 고집이 있어서인지 살아내야만 하는 그 집에 드러눕겠다고 우겼다. 이때도 우리 부모님께서 날 강제로 끌고서라도 본가의 방안에 가두셨어야 하는데 나 스스로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몸을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데 가장 하기 싫었던 일은 마당 저 구석에 위치한 옛날식 화장실에 가는 것이었다. 몸을 올바로 지탱하지 못하면 꼭 아래에서 변소 귀신이 나를 잡아당길 것만 같아 허벅지와 종아리에 얼마나 힘을 주고 버텼던지, 그 기억은 아직도 1초 전 사건마냥 생생하다.
자취의 시작은 절망적이었다.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나오겠다고 했으니 그 정도 각오는 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환경에서도 살아가기 위한 방법은 끊임없이 떠올랐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까. 그에 맞춰 적응하다보니 낭만이라는 감정까지 피어올랐다. 마냥 괴로워하고 원망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의 선택이었고 나의 의지였으니까,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살았던 것이다.
자유의 대가는 쓰라렸으나 그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정말 잘 선택한 것 같다. 사서도 한다는 그 고생 아니던가. 그 당시 왠만한 어려움과 놀라움은 다 경험해봐서인지 요즘은 이것저것 다 그저그렇게만 보인다. 뭐라도 다 헤쳐나갈 수 있고,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뻔뻔함마저 든다. 그로 인해 나의 자존감도 단단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희망이 있었으니 그 희망을 양껏 배부르게 먹고서 그 에너지로 하루를 무사히 살아냈으니까. 그리고 다음날도 살아내야 했으니까.
물론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가겠느냐고 누군가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한다면 당연히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단언하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 참 열심히 잘 살았어. 부모님에게 아무런 금전적인 도움도 받지 않고 너답게 살려고 그렇게나 아등바등했는데 결국 해냈잖아. 난 네가 해낼 줄 알았어. 그러니 지금도 가끔은 네 사진을 보면서 흐뭇하게 미소짓곤 해. 그때의 네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 정말 고마워."
아,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손수건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