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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이응 May 14. 2021

아들의 나들이

2021년 묘사(墓祀)의 의미

땀이 난다. 늦가을 볕이 따가워서가 아니라, 뭔가 잘못될 것 같다는 걱정이 이제는 현실이 되어 당황했기 때문이다. 갈림길 하나하나를 살펴가며 봉계 산소를 찾아가는 길을 몇 번이나 되짚어가고 있지만, 도무지 길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만 해도 작년까지 대여섯 번은 왔던 곳이고, 일행인 인쇄소 당숙은 그 몇 곱절은 오셨을 곳이다. 이 산 아래 마을에서 초등학교를 다니셨다던 과수원집 어르신이 올 해는 무릎이 아프셔서 같이 못 오셨지만, 이렇게 속절없이 길을 잃을 줄은 차마 몰랐다. 결국 다시 한번 차를 돌려 내비게이션 상의 마지막 주소인 포장도로로 나와, 다음번 선택지인 다섯 번째 농로를 따라 들어간다. 이 좁은 흙길의 끝에 내가 오늘 묘사를 지내야 할 산소로 올라가는 산길이 있어야 한다.

묘사(墓祀)는 조상의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를 뜻하며, 시제(時祭), 묘제(墓祭) 또는 묘전제사(墓前祭祀) 로도 불린다. 보통은 집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 조상의 묘소에서 일 년에 한 번 10월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말한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고향인 경주에 내려와서 이 행사에 참석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은 거의 오지 않는 남자 어른들만의 회합이었지만, 까마득한 친척 할아버지들이 큰집의 큰손자라고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들을 손에 쥐어 주시는 것이 재미있었다.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는 한식날이나 추석날 성묘를 가는 세시풍습에 대해서만 배웠으니, '왜 우리 친척들은 늦은 가을에 성묘를 가나?' 하며 갸우뚱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냥 지방마다 형태를 달리하는 "풍습의 사투리"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할아버지와 함께 갔던 어린 시절 묘사 때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였었다. 하지만, 나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부터 참가하는 사람들의 규모가 부쩍 줄어들었다. 매년의 근황 이야기에는 어떤 어르신이 어떤 이유로 세상을 떠나셨다는 말들이 이어졌다. 물론 그분들의 자손들도 있을 것이나, 새롭게 이 어른들의 회합에 참여하려는 젊은 친척들은 거의 없었다. 일흔을 넘기신 우리 아버지가 가장 연장자가 된 지금은 매년 참석하는 사람의 수가 열명이 겨우 넘는 지경이 되었다. 묘사도 이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풍습이 되었다.

출석을 부를 것도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지역 간 이동이 어려워진 이번 회합에는 혹시라도 문제가 될 것을 걱정해서 참석ㅎ지 못한 젊은 숙부들이 많았다. 네 곳의 산소들에 조(組)를 짜서 다녀오려면 아무리 적어도 여덟 명은 있어야 했다. 그런데, 무릎이 불편해서 산에 못 오르시는 과수원집 어르신을 빼면 정말 2인 1조로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 곳의 산소 중에 가장 멀고 가는 길도 헛갈리는 봉계에 갈 후보는 누가 봐도 내가 일 순위였다. 당첨이다.

사실 몇 해 전부터 이런 날이 올 것 같아 최소한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1년에 한 번 내려오는 경주이고, 올 때마다 네 곳 가운데 한 곳만 간다. 그러니, 2~3년 만에 한 번씩 가는 낯선 시골길을 찾아간다는 건 나 같은 길치에게는 그저 요행수를 바라는 셈이다. 최근엔 일흔을 넘기신 어르신들은 예전 길만 고집하시고, 예순을 바라보는 젊은 숙부들은 새 길이 생겼다고 다투시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나도 뭔가 자립의 방법이 필요해졌다. 나는 서울에서도 출근길을 제외하고는 내비게이션을 의심 없이 믿는다. 그래서 낯선 시골길에서도 부족한 방향감각을 기술의 도움으로 극복해야 한다. 봉계 산소를 찾아갈 때는, 차를 세우고 산소를 향하는 산길로 올라가는 길가 옆에 늘 이정표가 되어주는 빛이 바랜 빨간 슬레이트 지붕의 농기구 창고가 있다. 하지만 창고에 주소는 없다. 대신 작년에 봉계에 왔을 때 몇몇 중요 갈림길들의 주소를 확인해 두었다. 미리 준비한 건 잘한 일이었다. 오늘만 몇 번을 그 헨젤의 마지막 조약돌에서 다시 출발했다.

찾았다. 꼬불꼬불 좁은 길이지만 일단 산길로만 접어들면 산소까지는 헛갈리지 않고 갈 수 있으니 안심이 된다. 운동을 위해서는 청계산은 커녕 아파트 뒤 불정산도 오르지 않지만, 경주에 내려와 이렇게 20~30분 걷는 것은 오히려 기운이 난다. 살아있는 가족들도 자주 만나지 않는 시대에 돌아가신 조상의 묘소에 간다는 게 나에게만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종손(宗孫)인 아버지에겐 중요한 연례행사이고,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그래서 이 연례행사는 나에게도 제법 중요한 아버지와의 시간이다. 아버지가 건강하신 덕에 함께 할 수 있는 가을 나들이다. 월급쟁이 아들이 바쁠까 하는 걱정에, 따로 어디 여행 가자고 하실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저 일 년에 한 번, 이렇게 경주에 함께 할 뿐이다. 앞으로도 십 수년은 아버지와 같이 아버지의 고향인 이 곳에 내려올 것이다. 계속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마에 땀이 맺히지만 제법 선선해진 가을 날씨에 시원하게 식어 내린다. 능선까지 올라간 다음 평평해진 산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산소가 나온다. 가지고 올라간 간단한 제물(祭物)을 차리고, 절을 하고, 축문을 읽고 마무리를 한다. 차를 돌려 포장도로까지 나오는 데에는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들어가는 방향에서는 그렇게 헛갈리던 농로였는데, 나오는 방향에서 보이는 풍경은 어제 본 듯 익숙하다.

30여분 논밭길을 헤매어 다닌 끝에 묘사를 마친 터라, 나와 인쇄소 당숙은 점심시간을 넘겨 약속한 식당에 도착했다. 이미 다른 조(組)의 어르신들은 얼큰하게 소주를 걸치시고 목소리를 높여 근황 이야기를 이어가고 계셨다. 몇 해전부터 "알쓸신잡" 같은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경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 덕에 서기 57년부터 1000년의 세월 동안 한 나라의 수도였던 이 오래된 도시는, 동서남북 가릴 것 없이 외지 사람들이 놀러 와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나는 커다란 테마파크가 되어버렸다. 여전히 경주에 터를 잡고 계신 어르신들은 외지에서 모인 친척들에게 이 오랜 도시의 변화에 대해서 신이 나서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나도 몇 해 전 "황리단"이라는 말을 듣고 제법 힙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황남빵을 먹으러 가본 것은 관광객들을 위한 식당과 카페들이 생기기 한참 전의 일이다. 서울 백화점에서도 사 먹을 수 있는 팥빵을 먹기 위해 부러 줄 서서 기다리는 수고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주말에는 교통체증이 심해졌고, 무엇보다도 개발이 엄격히 제한되었던 구 도심은 천년고도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옛스러운 멋이 없어지지는 않을까? 나도 고작 1년에 한 번 내려오는 서울내기면서, 오지랖 덕에 부리는 심술이 났다.

"차종손(次宗孫), 오늘 길도 헤매고, 멀리 다녀오느라 많이 고생했네. 소주 한잔 하시게."

어르신들의 술자리에 끼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서 요즘 뜨는 먹거리라는 경주 팔우정 해장국을 소개하는 유튜브를 보고 있던 나에게, 집안 어르신 한 분께서 술을 권하신다. 예전에는 제사 지내는 순서나, 축문 읽는 방법 같은 것들을 깐깐하게 배워주시고 잘 기억하지 못하면 그만큼 야단도 많이 치시던 서슬이 퍼렇던 집안의 군기반장이셨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부쩍 기력이 쇠하신 듯 보여 나도 마음이 조금 쓰이던 차였다.

"오늘 봉계 가는 길 단디 외워 두었제? 내년에도 봉계는 차종손이 담당하시게."

물러설 곳 없는 외통수, 내년에도 당첨이다. 땀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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